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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콘텐츠 공주 근대의 풍경

공주 근대의 풍경

공주 근대의 풍경

  <공주 근대의 풍경> 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의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사진과 함께 엮은 스토리입니다. 공주술도가의 탄생이야기나 대중예술과 민중계몽의 교차점에 위치하였던 공주극장 이야기, 교육도시로서 출범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공주여사범학교 이야기 등 다양한 공주 근대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록물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공주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스토리의 신빙성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스토리가 갖는 공주의 지리적 위치를 지도 속에 지속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고장 공주의 근대시기 이야기를 차근차근 채워가는 전시콘텐츠입니다.

▸지은이: 송충기(공주학연구원 자료실장)
▸게재: 공주문화(공주문화원 발행)

  공주가 역사도시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하지만 원래 백제의 고도이자 충청의 수부였던 이곳은 행정도시이었다. 1932년 도청이 사라지면서 비로소 역사·교육도시로 탈바꿈했다. 말하자면 역사도시라는 이미지는 교육도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근대의 ‘산물’인 셈이다.

  공주에서 역사유물에 대한 관심을 크게 표명한 사건은 <공주보승회>(公州保勝會)의 설립이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당시 일기 시작한 ‘근대관광’의 물결 때문이었다. 근대적 교통이 발전하고 교양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소위 유람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문기사를 종합하면, 1924년에 이것을 설치하려는 계획이 나왔는데, 설치 목적은 사적명승에 대한 조사와 보존을 위한 것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늦어도 1925년에 설치되었음이 분명한데, 그 해의 예산안을 보면 보조금과 기부금을 합하여 수입이 삼천백 원 정도였고, 지출항목으로는 “선전비, 조사비, 산성구적(舊蹟)의 보수, 마곡사 도로보수” 등이 있었다. 회의가 군청에서 열렸고 군수 등이 참석했으며, 도지사를 고문으로 추대한 것으로 보아 지역유지들의 관변단체적 성격을 지녔다.

박물관으로 이용된 선화당 건물

  <공주보승회>가 백제유적의 보존을 내세웠다면, 발굴과 연구는 바로 잘 알려진 가루베 지온(經部慈恩)의 몫이었다. 당시 공주는 백제의 고도였지만 총독부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개인연구자였던 가루베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1927년부터 공주고보에서 일본어 교사로 근무하게 된 그는 대대적인 발굴과 조사활동을 벌였고 학생들에게 향토사를 가르쳤다. 또한 공주고보에 ‘향토관’을 설치하고 수집한 유물을 보관했다. 그가 일본에서 출간된 <고고학잡지>에 연재한 논문 편수만도 10건이 넘는다. 특히 1930년대 초부터 고분 발굴로 상당한 양의 유물이 수집되자, 이것을 대중에게 알리고 교육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1933년 초에 일본의 <박물관잡지>에 백제박물관건설기성회(이것이 후술할 <공주고적보존회>로 보인다)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수많은 고적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백제에 대한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한일병합이 이루어지기 이전부터 백제에 대한 발굴과 조사가 시작되었고 이후 총독부는 지속해서 역사연구에 힘을 쏟았다. 일제가 이렇게 한 것은 물론 통치의 방편이었다. 유구한 우리의 역사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 아니라 ‘내선일체’ 등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을 뿐이었고, 따라서 왜곡과 도굴 등 수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그러던 차에 1932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자, 지역유지들과 공주군은 행정도시의 기능을 대체할 대안을 찾았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사범학교의 설치로 시작될 교육도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박물관의 설치로 나타날 역사도시였다. 1932년 초부터 충남거부 김갑순이나 일본인 유지였던 미야모토 겐키치(宮本善吉) 등이 나서서 역설했던 것이 바로 백제박물관의 건립이었다. 이를 구체화시킨 조직이 1933년 즈음에 결성된 것으로 알려진 <공주고적보존회>(公州古蹟保存會)이다. 이 조직은 <공주보승회>의 흐름을 이어받아, 역할과 성격이 유사했다. 예컨대 “공주 및 그 부근의 백제 및 조선시대의 유적·유물을 보존 및 수집, 조사 연구 및 소개 그리고 기타” 사업이 보존회의 목적으로 제시된 것, 사무소가 공주읍사무소 내에 있다든지 혹은 대표가 미야모토라는 유지였다는 점, 또한 갹출금 혹은 기부금으로 운영되었던 정황 등등을 보아 그렇다. 아마도 도청이전 반대운동과 연계되다 보니까 관청은 뒤로 물러나고 지역유지가 앞으로 나선 것처럼 보인다.

  초반에는 ‘백제박물관’의 건립이 쉽게 이루어지는 듯했다. 총독부에서 이 요구에 찬성하고 삼천 원을 보조해주기로 했고 도에서도 지방비 이천 원을 ‘선뜻’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시민들이 부담하기로 한 이천오백 원도 지역유지였던 오길상이 천원을 기부하면서 예산문제가 해결되었다. 부지는 앵산공원 근처의 과수원으로 하고, 건물은 도청이전으로 비어있던 선화당 건물을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은 조금씩 늦어져 193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신제를 지내고 공사에 돌입하여 1939년 5월 5일에 쌍수정에서 낙성식을 거행했다. 돌이켜보건대, 흥미롭게도 바로 그날 공주여자사범학교의 낙성식도 함께 열렸으니, 교육 및 역사도시로서 공주가 새로운 면모를 단단히 부각시킨, 실로 의미심장한 날이었다.

공주박물관의 위치

  하지만 낙성식과 더불어 바로 박물관이 개관되지는 못했다. 아마도 유물을 전시할 설비비가 모자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관이 지체되자 그 해 여름 박춘금이 삼천 원을 기부하면서 개관준비에 다시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1940년 드디어 일반인에게 유물을 전시하여 개관을 하였지만, 전쟁의 상황 때문인지 재정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41년 <공주고적보존회> 대신 <공주사적현창회>(公州史蹟顯彰會)라는 재단법인이 발족하였다(발족된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이 법인의 공식설립일은 1941년 6월 14일이다). 아마도 백제박물관의 운영을 담당하고 재정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 법인형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설립 당시 이 법인의 총자산은 약 삼만 원이었고 기부방식으로 출자되었다. 읍장과 유지가 이사진으로 포진되었던 것으로 보아, 형태만 바뀌었을 뿐 거의 앞선 조직과 비슷했다. 그래도 내선일체의 목적으로 강하게 내세웠던 점만은 눈에 띈다. 말하자면 “공주를 중심으로 백제시대에 있었던 내선불리(內鮮不離)의 관계를 탐구하고 그의 사적을 현창하여 내선일체를 밝히려”고 했으니 말이다.

  이렇듯 ‘백제박물관’의 건립이 공주의 이미지를 바꾸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여러 유지의 관심과 지원이 큰 몫을 했다. 하지만 당시 백제연구가 일제의 식민정책에 이용되었다든지 혹은 도굴로 오히려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비판도 크다. 게다가 문화재가 당시 유지들의 호고적(好古的) 취미 수단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있기도 했다. 유지들이 예전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유물들을 비싼 가격에 사고 팔아서 나름의 우월의식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유지의 관심과 지원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1950년대에도 공주사적연구회가 존재했고, 이후에도 여러 단체가 공주의 문화유적을 사랑하고 보존하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노력이 없었던들 어떻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가능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