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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콘텐츠 공주 근대의 풍경

공주 근대의 풍경

공주 근대의 풍경

  <공주 근대의 풍경> 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의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사진과 함께 엮은 스토리입니다. 공주술도가의 탄생이야기나 대중예술과 민중계몽의 교차점에 위치하였던 공주극장 이야기, 교육도시로서 출범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공주여사범학교 이야기 등 다양한 공주 근대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록물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공주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스토리의 신빙성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스토리가 갖는 공주의 지리적 위치를 지도 속에 지속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고장 공주의 근대시기 이야기를 차근차근 채워가는 전시콘텐츠입니다.

▸지은이: 송충기(공주학연구원 자료실장)
▸게재: 공주문화(공주문화원 발행)

공주여자사범학교

  1939년 5월 5일 공주에서는 떠들썩한 행사가 연이어 벌어졌고, 기관장과 유지들은 거기에 참석하느라 온종일 정신이 없었다. 오전 9시에는 공주관립여자사범학교 본관 및 기숙사 낙성식이 있었고(1939년 12월에 이미 준공되었다), 이어 11시에는 금강 건너 신관리(현재 신관동)에서 농업학교 건물의 낙성식이 열렸다. 또한 ‘쌍수산성공원’ 광장에서 성대한 연회가 개최되어 총독부 및 충남도청 관계자, 그리고 시민 460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로써 공주는 이른바 ‘교육도시’로서 본격적인 출범을 알린 셈이었다.

  사실 1932년 대전으로 도청을 옮기기 전에도 공주에 학교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어느 정도 교육도시로서 일정한 역할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역의 중심도시가 맡는 기능의 하나였다. 이제 그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교육도시로서 위상을 갖는 일은 예전과 여러모로 달랐다. 여자사범학교는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선생님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여자사범학교는 경성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는 없었다. 그러니 오로지 경성과 공주 두 곳에만 있다는 점을 내세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조선 팔도에서, 아니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내로라하는 수재들이었다. 입시경쟁률만도 10대1을 넘어서는 것이 예사였고, 신입생 명단이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다.

공주여자사범학교 본관 건물: 사진은 해방 이후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데, 건물은 1939년 12월에 완공되었다.

  ‘교육도시 만들기’는 지역주민의 숙원사업이었다. 도청을 이전한다는 공식발표가 있고 난 1932년 7월부터 공주시민들이 줄기차게 요구한 것이 관립사범학교의 유치였다. 도청이전에 따른 보상을 요구할 때, 지역의 유지들과 일반 시민들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함께 주장한 것이 바로 관립사범학교의 설치였다. 마침 당시 총독부는 평양과 대구에 있었던 관립사범학교를 점차 다른 곳에도 증설하고자 했다. 공주시민들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공주에는 1922년에 설립된 도립사범학교가 존재한 적도 있었으니(이것은 아쉽게도 교육제도에 관한 법령이 개정되면서 1929년 폐지되고 말았다) 유리할 법도 했다.

  하지만 일반사범학교에 대한 유치가 주로 도청소재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점차 여자사범학교가 유치목표로 설정되었다. 1936년 2월 공주시민회 간부들이 모여서 여자사범학교를 공주에 설치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시민대회를 열고 각계각층의 요로에 민원을 넣고 여러 연줄을 동원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다. 이것이 효력이 있었던지 1937년 마침내 공주에 여자사범학교를 설치하기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쉬기에는 아직 일렀다. 말하자면 조건이 붙었던 셈이었다. 곧 교사신축에 따른 비용의 일부를 공주시민들에게 떠넘겼다. 시민이 부담하기로 한 기부금은 10만 원이었는데, 그것으로 농업학교를 장기면 신관리로 이전시키고 건물 일부를 개축하여 여자사범학교로 사용하려는 구상이었다.

  또 다시 난관에 부딪힌 공주시민들은 기성회를 조직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읍장이 회장을 맡아서 1936년 9월부터 대대적인 기부금 조성에 나섰다. 다행히 1937년 7월 예상되던 이전비용 7만 5천 원을 넘는 8만 원이 모금되자, 농업학교의 이전에 착수했다. 이듬해 2월에 신관리에 부지를 매입하여 농업학교 건물이 착공되었다(실제 총공사비는 약 7만 2천원). 이와 더불어 신설될 사범학교 교사도 27만 원의 예산으로 4월 초에 착공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공주관립여자사범학교는 1938년 4월 23일에 개교할 수 있었다. 교사신축이 이제 막 시작된 터라, 입학식도 주변 학교의 강당을 빌려 치를 수밖에 없었다. 소학교 졸업생이 진학하여 4년 동안 수학하는 심상과(4년제, 초기 정원 백 명)가 중심이었지만, 급한 교사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등교육을 마친 여학생을 1년 동안 가르치는 강습과(1년제, 첫 입학생 수는 2백 명)도 함께 운영했다. 공주에 거주하는 학생 몇몇을 제외하고 모두 기숙사(貞和寮)에서 생활해야 했고,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이곳 기숙사는 어느 교육관련 좌담회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거론될 정도로 명성이 있었다. 첫 해에는 기숙사 건물이 신축 중인지라 공주고등여학교 교실과 기숙사를 일부 빌려 260명을 수용했다. 해마다 학생 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기숙사는 계속 증축되었다.

공주여자사범학교의 위치

  새 교직 양성기관이 문을 열면서 주변 환경도 점차 조금씩 바뀌었다. 일본인 학생만 5백 명에 육박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또한 교원 양성에 필요한 실습을 위해 주변에 있던 금성공립소학교를 부속소학교로 변경했고 주변 소학교 여학생을 받아들였다. 1940년에는 신입생 학부형이 기부한 돈으로 운동장을 정비했다. 교사들도 계속 늘어났기 때문에 공주에 주택난을 야기할 정도였다고 당시 신문은 전한다.

  이렇게 지역주민의 정성으로 개교한 이곳은 늘 이 지역의 자랑거리였다. 전국에서 그리고 일본 본토에까지 온 똑똑한 젊은 인재들이 장차 자식들의 선생님이 될 것을 생각하면, 주민들 마음은 마냥 뿌듯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모두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공주에서 실제 경험한 바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인 선생은 서너 명에 불과했던 반면, 일본인 선생은 스무 명이 넘었다. 당연하게도 민족적 차별이 없을 수 없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 교육관이 본디 그러했지만 특히 전쟁이 점차 고조되던 때여서, 교육 목표나 내용이 군국주의 성향을 심하게 드러냈다. 천황에 대한 충성심과 맹목적인 애국심을 강조했으며, 전쟁을 옹호하는 강연과 훈련도 포함되었다.

  해방 후에도 이곳은 사범학교로 기능하였고 공주교육대학으로 명칭을 바뀐 이후에도 수많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길러내는 요람이 되었다. 중등교육을 책임지는 공주사대와 함께, 교육도시 의 면모를 책임진 셈이었다. 그러니 여자사범학교가 교육도시의 씨앗을 뿌려놓은 것만은 틀림없다. 다만 당시의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지금 그것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음이 심히 유감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