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근대의 풍경> 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의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사진과 함께 엮은 스토리입니다. 공주술도가의 탄생이야기나 대중예술과 민중계몽의 교차점에 위치하였던 공주극장 이야기, 교육도시로서 출범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공주여사범학교 이야기 등 다양한 공주 근대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록물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공주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스토리의 신빙성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스토리가 갖는 공주의 지리적 위치를 지도 속에 지속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고장 공주의 근대시기 이야기를 차근차근 채워가는 전시콘텐츠입니다.
▸지은이: 송충기(공주학연구원 자료실장)
▸게재: 공주문화(공주문화원 발행)
공주의 근대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뽕나무이다. 지금 공주하면 밤나무를 떠올리지만, 옛날에는 달랐다. 제민천 가에는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고 시내 한복판 ‘앵산공원’(오늘날 중앙공원)에는 그 이름처럼 벚나무가 빼곡했다. 여기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지금 시청과 공주여고 근처에 뽕나무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니 그야말로 상전벽해이다.
뽕나무밭과 누에치기는 산업화 시기까지 조선팔도 어디에서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조선시대에 ‘친잠(親蠶)’이라 하여 왕비까지 나서 누에치기를 권장했다지만, 공주의 양잠 역사는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일제는 양잠을 식민지 수탈의 주요한 종목으로 점찍고 일찍부터 이를 위한 조치를 시행했다. 1910년대부터 자생하던 뽕나무와 누에치기를 개량하여 ‘근대적인’ 양잠을 본격적으로 널리 보급했고, 이에 따라 관련 시설들도 하나둘씩 세워졌다.
우선 일제는 농가에 뽕나무 심기를 권장하는 한편 누에고치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교육과 공동사육을 실시했다. 뽕나무밭을 늘리고 생산성을 높이고자 군청이 대대적으로 나서서 사업을 독려했다. 품평회를 열어 상을 주는가 하면, ‘잠업증진15개년계획’에 지주들까지 동원하여 뽕밭소작을 늘리도록 했다. 또한 전국 각지에 잠업전습소를 설치해 기술보급에 나섰다. 일본 천황이 주었다는 은사금(恩賜金)으로 전습소를 여러 지역에 세웠는데, 공주도 그 가운데 한 곳이었다. 공주 전습소에서는 1911년부터 교육을 실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18년 폐지될 때까지 한 해 평균 약 130명이 교육을 받았다. 같은 시기에 누에공동사육장이 신관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잠업전습소도 그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농촌 여성들에게 누에고치를 기르는 방법을 보급했다. 1918년에 이것이 폐지되고 소위 <공주실업협회>라는 곳에서 공인된 전문적인 잠업 교육을 실시했다. 해마다 40여 명을 교육시켰는데, 이곳은 현재 공산성 남쪽 부근(현재 덕성공원 빌리지)에 있었고, 1920년대에 어느 지도에는 아예 그곳을 <잠업전습소>로 표기했다.
그러자 잠업과 관련된 다른 기관들도 속속 생겨났다. 1920년대가 되면 양잠기술에 관한 기관인 원잠종제조소(原蠶種製造所), 잠업취체소(蠶業取締所), 잠업전습소(蠶業傳習所) 등은 물론이고, 잠종냉장고, 군농회견공동판매장(郡農會繭共同販賣場), 제사(製絲)공장 등까지 자리를 잡았다. 일제는 양잠의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전통적인 우리 누에 대신에 일본종을 기본 품종으로 정했다. 이를 위해 <원잠종제조소>를 설치하여 우수한 누에씨를 농가에 보급했는데, 그 기관은 1915년 지금 공주시청의 북쪽 편에 세워졌다. 이와 더불어 우수한 누에씨를 오랫동안 저장하기 위해 현재 공산성 북쪽 사면에 빙고(氷庫)까지 설치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 잠종고는 겨울에 금강의 얼음을 채취하고 온도를 낮게 유지하여 다음 해 봄까지 누에의 부화시기를 늦추도록 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어 1924년에는 프랑스식 2층 잠실(蠶室)을 지었는데 1988년까지 그곳에 있었다.
총독부는 1919년 <조선잠업령>을 발표하여 누에씨 제조, 누에병 방제, 뽕나무 묘목 등 잠업에 관한 전반적인 규정과 조치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서 <잠업취체소>를 각 도에 설치했는데, 공주에는 1919년 5월 <원잠종제조소>의 길 건너편(현재 봉황초등학교 남쪽)에 설립되었다. <잠업취체소>는 도청 이전으로 1934년 대전으로 이사했다. 또한 생산된 누에고치를 공동으로 수매할 장소가 마련되어 현재 공주북중학교 근처에 군농회가 관장하는 공동판매장도 들어섰다.
잠업에 관련된 여러 시설이 갖추어지고 수료생 등 전문 인력이 늘어나면서 1920년대에 공주군은 어느 신문의 표현대로, ‘잠업의 원산지’로까지 알려졌다. 실제로 공주는 당시 충청남도 내에서 서산에 이어 누에고치 생산이 2위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잠업 농가도 이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초대 충남지사를 지낸 서덕순은 1930년 동아일보에서 지방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공주가 “잠견(蠶繭)의 산지요, 인근에서 많이 생산하니” 잠사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1920년대에는 누에고치를 원료로 실을 뽑는 제사공장도 공주에 들어섰다. 그 이전에는 집에서 누에고치로부터 실을 뽑았다. 이 일에 제법 숙련도가 필요하다 보니 개인이 마을에 가서 제사전습회를 개최하여 실을 뽑는 기술을 보급한 경우도 있었다. 이후 공장이 들어서면서 시골 여성들은 공장에 취직했다. 예컨대 우성면 출신인 이난수(李蘭秀)는 1924년에 제사업에 뛰어들어 발로 돌리는 기계를 설치하고 20여 명의 여성을 고용했다. 생산량이 늘자 2년 후에는 지금 산성시장 자리에 2만 5천 원을 투자하여 공장을 세웠다. 건물 규모는 2백 평이었고 특히 일본에서 들여온 3마력짜리 제사기를 사용함으로써 생산량이 월등히 높아졌다. 직원 수도 70여 명으로 늘었다. <이난수제사공장>은 성장을 거듭하여 1929년에 주식회사로 변경되었는데, 서덕순, 홍원표 등 공주 유지 여럿이 주주로 함께 참여하여 자본금을 25만원으로 증액했다. 명칭도 <남선제사주식회사>(南鮮製絲株式會社)로 바뀌었고 사장으로는 공주 경제계의 중심인물이었던 심재욱이 취임했다. 이후 사업이 번창해서 직원 수가 다시 두 배 이상으로 늘었지만, 원료부족으로 심각한 경영난과 1932년 중역들 사이의 갈등으로 심재욱이 구속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사실 제사업은 총독부의 비호 아래 일본인들이 독점적인 혜택을 누린 것이었기에 주로 조선인으로 구성된 <남선제사주식회사>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제사공장은 시골 여성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일터였다. 부여 석성면에서 생활고를 겪던 소녀 3명이 무작정 대전에 있던 제사공장에 취직하겠다고 찾아와 금강 변에서 길을 잃고 헤매자 경찰이 나서 귀가시킨 일도 있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공주 시내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사공장에서 여직공이 동맹파업을 일으켰다는 기사를 보면, 이후 산업화 시대에 있었던 ‘여공’들의 신산한 삶이 떠오른다.
나중에 유구가 직조업으로 유명해지면서 ‘삼천공녀’라는 말까지 유행했지만, 일제강점기에 공주는 제사업으로 이름깨나 날렸다. 하지만 이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아쉽기 그지없다. 유구 직조업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더 늦기 전에 유구에 남아 있는 유적의 일부라도 찾아서 보존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