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근대의 풍경> 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의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사진과 함께 엮은 스토리입니다. 공주술도가의 탄생이야기나 대중예술과 민중계몽의 교차점에 위치하였던 공주극장 이야기, 교육도시로서 출범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공주여사범학교 이야기 등 다양한 공주 근대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록물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공주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스토리의 신빙성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스토리가 갖는 공주의 지리적 위치를 지도 속에 지속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고장 공주의 근대시기 이야기를 차근차근 채워가는 전시콘텐츠입니다.
▸지은이: 송충기(공주학연구원 자료실장)
▸게재: 공주문화(공주문화원 발행)
근대에는 어김없이 자본이 등장한다. 그 이전에도 돈과 현물, 토지 등의 재산은 있었지만, 새로운 경제체제가 작동하면서 자본이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섰다. 자본을 다루는 기관, 곧 은행의 등장도 필수적이다. 은행이 없던 시절에도 이자를 통한 돈놀이는 있었지만, 사적인 거래였다. 이자가 높았을 뿐더러 돈을 꾸는 사람도, 돈을 꿔주는 사람도 확실한 것이 없어서 뭔가 찜찜했다. 벌이가 그나마 나아서 곗돈을 부어 조그만 종잣돈이라도 모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돈을 변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은행이 생기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근대적인 돈벌이 기관인 은행은 19세기 후반 일본이 처음 도입했다. 그것을 본 따 대한제국 시절에 여러 은행이 설립되었다. 공주에 금융기관이 설치된 것도 이때였다. 1906년에 농공은행이 설치되면서 다른 주요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공주에도 지점이 생겼다. 이것이 이듬해 한성농공은행에 합병되면서 한호농공은행이 되었다. 지점은 이름만 바뀐 채 그대로 남았다. 1918년에는 그것이 다시 식산은행으로 개편되면서 식산은행 공주지점이 생겼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식산은행은 일제강점기에 종합금융기관으로 경제적 수탈의 대명사였다.
농공은행이 생기면서 그 보조기관으로 금융조합이 생겨났다. 전국적으로 여러 지역에 금융조합을 설치했는데, 공주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정학하게 말하자면 일반적인 상업은행이 아니라 국가가 지원한 조합형태의 은행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농협과 비슷했다. 1907년 신설 당시 이 금성금융조합은 놀랍게도 전국에서 가장 많은 조합원 수를 자랑했다! 당시 조합원이 무려 1,358명에 달해, 나중에 정부기관에서 조합원의 신용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공문을 보내올 정도였다. 그만큼 이곳에는 은행이 필요했던 것일까?
원래 내세운 취지는 조합원에게 영농자금을 빌려주어 농촌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었지만, 일제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면서 금융조합의 성격이 크게 변했다. 한마디로 소작농 등 정말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그다지 혜택이 없었다. 오히려 자작농 이상이나 지주들에게 유리한 조합이었다. 게다가 총독부가 감독하는 전형적인 관치금융의 형태였다. 조합원 임원도 말로는 선출이지만 사실상 총독부가 뒤에서 좌지우지했다. 따라서 이곳이 국가 시책에 맞게끔 운영되리라는 것은 뻔했다. 사실상 총독부가 돈줄을 쥐고 농촌과 지방을 장악한 셈이었다.
근대적인 상업시설이 들어서면서 시장이 커지고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농촌만 아니라 지방의 상인들에게도 돈이 필요했다. 그러자 일제는 1918년 6월에 제정된 <금융조합령>으로 도시의 소시민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그 후 공주에서는 농촌 지역을 담당하는 금성금융조합과 함께, 읍내의 도시민과 외곽 3개 면을 대상으로 한 공주금융조합이 신설되었다.
이렇듯 금융조합이 지역경제를 순환시키는 중요한 기관으로 부상하면서 금융조합의 중요한 자리는 지역유지의 독차지가 되었다. 충청갑부 김갑순도 1920년 대 초에 공주금융조합장을 지냈고, 초대충남지사였던 서덕순은 아버지 서한보와 함께 2대에 걸쳐 조합장을 역임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아주 드문 사례가 되었다. 금융조합 이사로 활약했던 이들도 대부분 지주나 상인 출신의 부자들이었다. 금융조합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비교적 저금리로 대출을 해주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고는 하나, 이들이 장악한 금융조합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일을 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영명학교 교사출신으로 공주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가 옥고를 치렀던 김관회가 그렇다. 1923년 당시 공주금융조합의 조합장이었던 김갑순과 이사였던 심상구가 사퇴했는데, 논란 끝에 일본인이 조합장으로, 김관회가 이사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김관회는 이후 대부해 준 돈이 회수되지 않으면서 그 책임을 지고 야반도주를 감행해야만 했던 불행한 인물이다. 독립투사가 일제의 경제적 첨병이나 다름없었던 금융조합의 이사를 지냈고 그 때문에 공주를 떠났던 저간의 사정은 사실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주변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고자 순수한 동기에서 맡았던 일인데, 일제의 모략에 빠져 어쩔 수 없이 공주를 떠나 일본과 제주 등에서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단다.
1918년에 도시민을 위한 금융조합이 생겨난 것과 동시에 도 단위로 여러 금융조합을 하나로 묶어서 도청에서 관리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충남금융조합연합회인데, 이 연합회가 지은 건물이 바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구읍사무소, 곧 지금은 공주역사영상관이다. 원래 충남금융조합연합회는 도청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지만, 1923년에 이만 오천 원을 들여서 2층짜리 건물을 신축하여 업무를 시작했다.
현재 금성금융조합 건물의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공주금융조합 건물이나 충남금융조합연합회 건물은 모두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단순한 좌우대칭형의 직사각형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던 전형적인 금융기관의 모습인데, 웅장함을 강조하려는 듯이 중앙 현관이 돌출되어 있었다. 내부는 기둥이 없이 넓게 보이는 무주식 공간으로, 중앙에 긴 카운터를 두고 객장과 사무공간으로 나누었다. 당시에는 신식 건물에 으리으리해서 아마도 주로 돈 많은 부자나 유지가 드나들고 서민들은 문턱이 높아 접근하기 어려웠을 듯이 보인다. 실제로 유지들의 모임도 주로 금융조합 건물에서 이루어졌던 것을 보면 그것이 단순한 상상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