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근대의 풍경> 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의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사진과 함께 엮은 스토리입니다. 공주술도가의 탄생이야기나 대중예술과 민중계몽의 교차점에 위치하였던 공주극장 이야기, 교육도시로서 출범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공주여사범학교 이야기 등 다양한 공주 근대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록물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공주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스토리의 신빙성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스토리가 갖는 공주의 지리적 위치를 지도 속에 지속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고장 공주의 근대시기 이야기를 차근차근 채워가는 전시콘텐츠입니다.
▸지은이: 송충기(공주학연구원 자료실장)
▸게재: 공주문화(공주문화원 발행)
작년에 지도 한 장에 잠시 넋을 잃은 적이 있었다. 1920년대 공주 원도심의 옛 시가지 점포들을 자세히 나타낸 지도였다. 몇 가지 오류가 있지만(가령, 제민천을 제성천으로 기입하는 등), 그동안 전해 듣던 점을 많이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고 정교했다. 개인적으로는 필자의 집이 일제강점기에 싸전이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는데, 실제 지도를 보니 정말 그러하지 않는가! 당시 상점이나 대부분의 관공서 건물은 사라졌지만, 금융조합연합(구읍사무소, 현 공주영상역사관)처럼 다행히 남아 있는 건물도 있고. 우체국처럼 건물은 바뀌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도 있다. 또 목욕탕 건물처럼 최근까지도 목욕탕을 운영했거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도 많다.
그렇다면 공주 원도심에 근대적인 시가지가 형성된 것은 언제쯤일까? 조선시대에는 감영(현 사대부고 자리), 공주목(구 공주의료원 자리), 공산성에 관청 시설이 집중되어 있었고, 그 주변에 민가들이 있었을 것이다. 대통교 남쪽으로는 약령시가 크게 열려서, 20세기 초까지는 아무래도 그곳이 공주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대통교에서 금강에 이르는 제민천변은 홍수가 나면 침수가 잦았기 때문에 시가지가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던 요소는 교통망, 특히 철도였다. 철도는 없던 도시를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냈고 또 번성하던 도시도 금방 쇠퇴하게 만들었다. 대전과 조치원이 전자라면, 공주는 후자였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이곳을 비껴간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공주와 조치원, 혹은 강경을 잇는 철도부설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20세기에 공주는 철도와 인연이 없었다.
그 때문에 공주의 도심은 다른 지역에서 비하면 ‘서서히’ 변화했다. 물론 당대인들은 분명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자주했을 터이지만 말이다. 실제로 이곳의 강산은 십 년마다 변했지만, 그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 여기에서 먼저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외국인이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앵산공원(현재 중앙공원) 언덕에 영명학교 등 서양식 학교와 선교사 주택, 교회를 지으면서 시가지에 큰 변화가 생겼다. 또한 일제의 강점으로 공주로 이주한 많은 일본인은 점차 시내 중심지에서 관청과 상업을 도맡으면서 도심의 풍경을 바꾸고 있었다.
풍경이 아니라 구조상으로 도심을 크게 변모시킨 것은 1918년에 시가지 정비계획이었다. 바로 이 무렵에 큰 도로를 주축으로 시가지 구획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큰 중동사거리(중동교차로)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큰 길이 그 중심축이었다. 지금의 무령로(동서)와 웅진로(남북)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 이전 지도에서 이 두 도로가 존재했지만, 시가지 도로라기보다는 시내 외곽의 도로처럼 여겨졌다.
충청의 거부 김갑순도 도심의 구조를 바꾸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 도시에서 시장의 경제적 기능을 간파한 그는 우선 쇠퇴해가는 약령시장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그는 중동의 작은 사거리에서 큰 사거리에 이르는 지역에 눈을 돌렸다. 이곳에 돈을 투자하여 침수지역을 매립하고 시장으로 만들어 사설 점포 200여 채를 개설했다. 당시 전국에 몇 안 되는 사설시장이 생긴 것이었다. 이곳에 시장이 들어서자, 충남도청, 대통교, ‘작은 사거리’를 중심으로 관청과 학교 등 공공시설, 종교시설, 극장, 요정, 여관, 양복점, 제과점, 목욕탕, 사진관 등이 속속 들어오면서 근대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1926년에 작성된 공주시가지 지도(대한민국박물관 소장)이다. 서울 백양(白楊)이라는 곳에서 발행된 (작성자 遊佐峻, 인쇄소는 지금의 서울 저동에 있던 동양당인쇄소) 이 지도는 30전에 판매되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의 안내서라고 할 만큼 역사, 정보, 심지어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기재되어 있어서 이주 등 다목적으로 사용된 것일 수도 있다. 당시 부여와 공주에 멀리 일본에서까지 온 관광객이 제법 있었는데 이들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보다 한 해 전인 1925년 6월 『동아일보』기사를 보면 동아일보 공주지국에서 사회교육의 차원에서 <부인견학단(婦人見學團)>을 모집하여 공주 도회지를 보여주었다.
지도에서 보면, 시가지 상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관과 요리점이다. 서너 집 건너 여관이나 요정이 하나씩 있을 정도로 밀집되어 있었는데, 그만큼 관공서와 기업들이 부근에 많았기 때문이다. 도청, 군청, 법원, 경찰서, 학교, 병원이 즐비했던 곳이라 유동인구가 많고 돈 씀씀이가 남달랐다. 도청에 관련된 공무원만 450명 정도 되었다. 또 출장이나 접대가 많아서 고급음식점과 여관이 성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30년에도 이곳에 기생이 제법 많았던 것도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게다가 자동차운송, 남선흥업, 제사공장, 전기회사 등 기업도 많이 있었다. 대전에 철도가 놓이고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상업이 훨씬 더 번성했지만, 공주의 상업이 아직은 이에 못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철도 대신 발전한 도로 때문에 자동차운송업은 오히려 대전을 능가할 정도였다. 또한 포목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오복점(吳服店, 고후쿠텐)과 양복점도 적지 않았다. 근대의 멋쟁이 신사들이 경성에서는 백화점을 찾았겠지만, 공주에서는 이곳에 단골로 드나들었다. 새로운 유행이 들이닥치면 이들은 공주의 멋쟁이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기도 했다.
이 지도를 토대로 구도심 상점들의 역사를 하나씩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조심스럽게 해본다. 구도심의 과거 여행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잠시 그러한 기분을 가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앞에서 언급한 <부인견학단>의 동선을 지도에서 찾아 기억여행을 떠나보자. 당시 견학 코스는 <공주군청>, <공주면사무소>, <도립병원>, <식산은행지점>, <공립보통학교>, <남선회사>, <계명회사>, <대전자동차부>, <조선자동차부>, <흑전착유장>, <실업협회>, <형무소>, <전기회사>, <도기조합>, <우편국>, <경찰서>, <공주지방법원>, <충남도청>, <경관교습소>, <공주금융조합>, <원잠종제조소>, <종묘장>, <사범학교>, <수원지>, <고등보통학교>, <영명학교>, <서양인 가정>이었다. 지도에서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때 그 부인들이 걸었을 도심을 따라가며 공주로의 상상 속 과거여행을 즐겨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