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근대의 풍경> 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의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사진과 함께 엮은 스토리입니다. 공주술도가의 탄생이야기나 대중예술과 민중계몽의 교차점에 위치하였던 공주극장 이야기, 교육도시로서 출범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공주여사범학교 이야기 등 다양한 공주 근대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록물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공주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스토리의 신빙성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스토리가 갖는 공주의 지리적 위치를 지도 속에 지속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고장 공주의 근대시기 이야기를 차근차근 채워가는 전시콘텐츠입니다.
▸지은이: 송충기(공주학연구원 자료실장)
▸게재: 공주문화(공주문화원 발행)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충청남도 공주의료원>이 최근 웅진동에 병원을 새로 짓고 이사했다. 1910년 중동에서 <관립 공주자혜의원>으로 출발하여 근대적인 공공의료서비스를 제공한 지 106년 만이다.
한말에 근대적 의료시설이 생겼지만, 경성이 아닌 지방의 주민들은 치료를 받는 데에 어려움이 컸다. 아픈 증세가 있으면 전통적인 민간요법에 의존하고, 조금 심각해진다 싶으면 굿을 하거나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 먹거나 침을 맞았다. 사실 공주는 대구와 전주 등과 함께 약령시로 소문이 나 있었고 유명한 한약방도 제법 있어서 사정이 조금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흔적도 찾기 어렵지만 중동 인근에 대규모 약재 시장이 들어서곤 했다. 몇 달씩 열리는 시장은 약재 생산자와 상인들로 붐볐는데, 기록을 보면 1911년에도 김갑순과 안화경 등이 주도하여 약령조합을 결성하고 그해 12월 1일에 약령시가 열렸다.
1900년부터 공주의 몇몇 인사들이 병원과 의학교를 설치하고자 여러 차례 청원도 하고 일도 추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서양 의술을 배운 사람도 없었고 또 그에 따른 건축비와 시설비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물론 공주에는 그 이전부터 서양의술이 조금씩 행해지고 있었다. 감리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교회를 짓고 신기한 서양의술을 이미 선보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병원을 지어서 치료한 것은 아니었다. 감리교 선교사들도 근대식 병원의 수요와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것의 설립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예산 부족과 의견 차이로 실현하지 못했다.
이렇듯 약령 고을에 ‘콧대 높은’ 서양식 근대 병원이 처음 들어온 것은 앞서 말한 대로 1910년 <공주자혜의원>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에도 일본인 거주자가 늘어나자, 통감부는 이들의 건강과 치료가 우선 염려되었다. 무엇보다도 전염병의 창궐이 문제였다. 많은 사람들, 특히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에는 전염병이 치명적이었다. 1906년 공주에 홍수가 났을 때도 ‘적리병(이질)’이 크게 번져 대대적인 조치가 뒤따랐다. 그러니 일반적인 질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전염병의 퇴치를 위해서도 근대적인 의료기관이 필수적이었다.
일제 통감부는 경성에서 근대식 병원이 성공을 거두자 예산을 세워 지방의 도시에 비슷한 형태인 <자혜의원>을 계속 세웠다. 목조로 신축된 <공주자혜의원> 건물은 간단했지만 사람들이 이전에 알던 치료공간과 달랐다. 무엇보다도 이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의사가 환자 집으로 왕진을 오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의사나 간호사가 여러 환자를 한꺼번에 돌보기 위해서 복도를 통해 일렬로 배치된 구조가 등장했다. 설립 당시에는 건물의 규모는 백 평 남짓했지만, 환자가 늘어남에 따라 지속적으로 개축과 증축을 거쳤다. 나중에는 옆에 있던 군청을 이사시키고 그곳에까지 병원은 확장하여, 부지만 2천 평이 넘고 건물 크기도 5백 평이 넘었다. 진료과목도 점차 확대되어 1930년대에는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피부비뇨기과, 안과로 확대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증축과정에서 전염병동을 일반 병동과 분리하여 만들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전염병을 대하는 당시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세균성 질병인 콜레라, 이질, 결핵, 두창, 성병이 창궐했다. 따라서 위생 당국은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가가 지원했던 <공주자혜의원>도 마찬가지였다. 결핵만으로 한 해에 전국에서 5만 명 이상이 사망하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이상과 김유정 등 많은 문인이 결핵으로 요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품 속에도 폐병 환자가 수없이 등장한다. 1924년 <공주자혜의원>에 결핵을 살피는 X-레이 기계가 설치되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인체의 내부를 찍는 기계에 놀라워했음은 물론이었다. 당시에는 성병과 마약도 유행해서, 1932년에는 마약치료소까지 설치되었다.
공주자혜의원>에서 초기에 치료를 담당하던 인력은 주로 일본에서 교육받은 일본인이었다. 나중에 조선인 의사도 생기고 그들이 공주에서 개업하는 경우도 생겼지만, 처음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심지어 간호사도 그러했다. 1930년대 초에 이 병원에 근무한 의사는 3명이었고 이들은 돕는 의원은 2명이었는데, 의원 가운데 1명만 한국인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에 반해 거의 모두가 조선인이었던 한의사는 의사가 아닌 의생으로 격하되었다. 침구사나 안마사도 거의 다 조선인이었다. 근대적 병원이 들어선 도심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방문하기에 용이했다. 또한 병원의 치료비도 만만치 않았으니 조선인은 위급한 상황에서나 그곳을 찾았고 웬만하면 여전히 한방으로 치료했다.
충청남도에서는 유일한 공공의료 기관이었기 때문에 자혜의원은 도민의 위생과 건강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위생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강연회와 전람회를 개최했으며, 해마다 며칠 씩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인근 지역들, 곧 논산, 홍성, 예산, 천안, 연기, 당진 등지에서 순회 진료에 나섰다. 나중에는 진료활동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간호할 보조 인력이 부족하자 조산부와 간호사를 양성하는 제도를 설치했다.
1925년 4월부터 중앙정부가 아닌 충청남도에서 경비를 지원함으로써 <공주자혜의원>의 정식 명칭은 <충청남도 도립공주의원>으로 개칭되었다. 이후의 재정의 추이를 살펴보면 이 기관의 운영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이에 힘입어 일본인이 훨씬 더 많이 거주하던 대전에도 도청이전과 함께 도립의원이 추가로 신설되었다.
이렇듯 <공주자혜의원>은 식민지시기에 주로 일본인을 위한 의료기관으로 출발했지만, 공주의료원은 이후에도 오랜 동안 지역주민의 건강과 위생을 책임져왔다. 한 세기에 걸친 ‘중동의 시대’를 마감한 이때 새로 시작된 ‘웅진동 시대’에도 더 알찬 공공의료가 널리 시행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