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근대의 풍경> 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의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사진과 함께 엮은 스토리입니다. 공주술도가의 탄생이야기나 대중예술과 민중계몽의 교차점에 위치하였던 공주극장 이야기, 교육도시로서 출범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공주여사범학교 이야기 등 다양한 공주 근대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록물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공주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스토리의 신빙성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스토리가 갖는 공주의 지리적 위치를 지도 속에 지속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고장 공주의 근대시기 이야기를 차근차근 채워가는 전시콘텐츠입니다.
▸지은이: 송충기(공주학연구원 자료실장)
▸게재: 공주문화(공주문화원 발행)
예로부터 우물은 마을 공간의 중심이었다. 대다수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물이 긷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부잣집의 경우 샘을 파고 자체적으로 식수문제를 해결했지만, 이들 역시 빨래나 다른 용도로는 공동우물을 사용했다. 개인우물은 그만큼 귀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공주에서 큰 공동우물이 많이 있었고, 그 가운데 몇몇은 다행히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다. 가끔 사진에 제민천이나 심지어 금강에서 빨래하는 모습도 있으나 그곳에서 식수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우물이 그저 물의 사용처로만 기능했을까? 마을 샘터는 빨래를 하고 얼굴과 채소를 씻는 등 생활에 필수적인 다양한 역할을 했고 그 중에서도 그곳이 소통공간의 구실을 톡톡히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주민들은 답답한 집에서 벗어나 마을 어귀에 있는 우물가에 모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남의 흉도 보고 크게 떠들면서 물뿐만 아니라 마음의 위안까지 긷었다. 특히 아낙네들은 시집살이 등과 같은 고단한 시름을 이곳에서 씻겨냈다.
일제강점기부터 우물은 점차 우리의 삶에서 멀어졌다. 특히 공주처럼 도시화가 진행되었던 곳에서는 수도의 도입으로 우물이 아예 사라졌다. ‘근대위생’의 구호를 내걸고 상수도의 건설이 착착 진행되었다. 여름에 연중행사처럼 찾아오는 전염병인 콜레라를 예방하자는 이야기와 우물이 얼마나 비위생적인 것인지가 널리 홍보되었다. 이에 반해 근대적으로 관리되는 수도가 또 얼마나 위생적인지도 함께 선전되었다. 이로써 질좋은 자연수를 누구나 마시던 과거의 우물은 한순간에 비위생의 주범으로 낙인찍혔다. 이와 반대로 “물이 꽐꽐 나오는 수도꼭지”는 근대성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일에 앞장선 사람들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이 집단적으로 거류하던 부산에서 1895년에 맨 처음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었고, 경성을 비롯한 다른 대도시에서도 이내 상수도 설치 계획이 속속 착수되었다. 공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충청남도 도청소재지였던 이곳에 인구가 급증하자 공주에서도 전염병의 위험성이 커졌다. 학교와 관공서가 밀집되면서 이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1920년 총독부는 공주에 수도공급을 허가했다. 상수도를 설치하려면 우선 물을 모으는 저수지가 필요했는데, 당시로서는 깨끗한 물이었던 금학동(당시는 금학리) 제민천 상류의 수원이 제격이었다. 그곳에 제방을 세워 저수지를 만들고 또한 그곳으로부터 침전된 물을 끌어왔는데, 이 물은 다시 공주고등학교 뒤편 언덕 위에 있던 여과지에서 정수되고 이어 그곳 배수지에서 시내로 급수되었다. 이렇게 1923년 충남에서는 처음으로 수돗물이 공주에 공급되었다.(강경이 한 달 전에 공급하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는데, 상수도공사는 공주에서 먼저 시작되었지만 그것의 완성과 급수는 강경보다 한 달 늦어졌던 것일까?)
그렇지만 어렵게 설치된 상수도가 자주 탁수로 변해서 여러 번 보강공사를 해야 했다. 수원지에 대한 애초의 축조공사가 잘못되어 비가 많이 내리면 수원지 물이 혼탁하게 변했다. 때문에 식수로 사용하지 못하고 집집마다 아침저녁으로 물지게로 물을 길어서 식수난을 해결했다. 게다가 겨울이면 수도관이 얼어붙어서 급수가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가뭄이 들면 수량이 턱없이 부족해서 시간제급수로 수돗물이 찔끔 나와서 사람들의 애를 무던히도 태웠다.
이러한 경우만 빼면 공주읍 상수도는 수질이 좋았던 모양이다. 관공서의 문서에서도 신문에서도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상수도의 혜택을 누구나 누렸던 것은 아니다. 기록을 보면 공주에서는, 일본인의 경우 열에 아홉은 수돗물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조선인은 잘해야 다섯 가운데 한 명 정도나 집에서 식수를 공급받는 호사를 누렸으니, 차별받는 느낌이 오죽했으랴! 게다가 물값도 서민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었다. 그러니 상수도는 일본인들을 위한 시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수원지를 지척에 두고 살았던 금학동 주민들에게 수도시설이 가장 늦게 놓였다니 이들에게 상수도는 오랫동안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었다.
공주의 정수장 시설이 큰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인구가 더 늘어나면서 도심에 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다. 이에 1960년대에 옥룡정수장을 신설하여 금강물을 식수로 사용했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하자 1970년대에는 금학동 수원지 아래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정수장을 추가로 설치했다. 현재에는 금학동 시설이 폐지되고 월송동에 최신식 정수장이 만들어져 일부는 대청댐 물을 사용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금학동 수원지는 이제 상수도원이 아닌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나마 금학동이 생태공원으로 변모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곳이 오랫동안 수원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금학동 수원지에는 실제로 관리자가 상주하여 밤낮으로 지켰다. 이곳 수원지는 물론이고 공주고등학교 뒤편 배수장에도 과거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어서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 결과 자연생태가 잘 보존되어 이제 우리에게 수돗물이 아닌 자연경관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