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근대의 풍경> 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의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사진과 함께 엮은 스토리입니다. 공주술도가의 탄생이야기나 대중예술과 민중계몽의 교차점에 위치하였던 공주극장 이야기, 교육도시로서 출범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공주여사범학교 이야기 등 다양한 공주 근대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록물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공주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스토리의 신빙성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스토리가 갖는 공주의 지리적 위치를 지도 속에 지속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고장 공주의 근대시기 이야기를 차근차근 채워가는 전시콘텐츠입니다.
▸지은이: 송충기(공주학연구원 자료실장)
▸게재: 공주문화(공주문화원 발행)
지금은 공주교도소가 금강 북쪽의 금흥동에 자리하고 있지만 1978년에 이사하기 전까지는 남쪽 교동에 있었다. 교도소하면 높고 하얀 담벼락과 그 위의 철조망, 그리고 우뚝 솟은 감시탑 등이 우선 머리에 떠오른다. 이들 이미지는 어쩐지 불온하고 위험스러운 건물이 주변지역과 확실하게 격리되어 있음을 보장해주고 서로의 안전을 확인해주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한복판에서 수형시설이 시민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점은 아무래도 어색하고 불편하다.
게다가 이들 형무소 재소자들은 자주 건물 밖으로 나왔다. 실제로 공주의 많은 건축이나 토목 공사에는 어김없이 수형자들이 참여했다. 지금은 황새바위 앞 제민천이 제법 반듯하게 흐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완전히 구불구불했다. 홍수 등의 피해가 빈번하자 당국은 이를 정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동원된 사람이 바로 이들 죄수였다. 공주에서 언덕과 산을 개간하거나 시설물을 짓거나 학교 운동장을 넓힐 때면, 특정한 복장을 한 채 쇠사슬로 묶인 수상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형무소 밖으로 나오면 주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지만, 죄수들이 느끼는 해방감도 컸다. 밖에서는 어쩐지 시간도 빨리 지나갔고, 담배를 몰래 피우는 등 딴 짓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사고도 일어났다. 탈옥 사건이 그렇다. 그렇다고 영화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그러한 극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일단 탈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아무래도 밖에서 작업을 할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다. 일제강점기에 어느 죄수는 몰래 못을 얻어서 미리 자물통을 따는 연습을 했다. 열심히 한 효과가 있었던지, 하루는 밖에 일하러 나와서 감시가 소홀해지자 허리에 채워진 쇠사슬의 자물통을 여는 데 성공했고, 간수의 눈을 피해 고마나루 쪽으로 도주했다. 허나 육혈포를 연이어 쏘아대는 간수들의 추격에 안타깝게도(?) 그만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수들이 이처럼 불가능한 탈옥을 기어이 감행하는 것은 감옥 생활이 그만큼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종종 감형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이었다. 기대했던 조기석방이 없자 재소자들이 밖에 들릴 만큼 통곡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때로는 죄수들이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 당시에도 죄수들의 처우개선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떤 정치범 인사는 출옥하자마자 형무소장을 방문하여 처우를 개선할 사항 8가지를 요구했다. 내용인 즉 이렇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는 것, 간수들의 무리한 행동, 억울한 자살의 해명, 그리고 여러 제도, 곧 의무대, 교회, 식단, 면회 등의 개선이었다. 실제로 거친 대우 때문에 자살한 죄수도 있었다. 형기를 8개월 정도 남기고 있던 어떤 절도범은 형무소 밖으로 작업을 나갔다가 몰래 담배를 숨겨두었는데 간수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 버렸다. 아마도 간수의 무차별 폭행을 견디다 못해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 공주감옥으로 불렸던 공주형무소는 1910년대에 크게 넓혀졌다. 당시 그 지역은 그나마 외곽에 속했지만, 곧 주변에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시내와 가까워졌다. 수용된 인구는 대략 사오백 명 정도였는데 대다수가 남자였다. 물론 적지만 여수감자도 있었고 따로 수용되었고 여간수의 통제를 받았다. 죄형을 보면 절도범과 강도범이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이들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그렇지만 살인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여성들이 더 억압받던 시절이어서였을까? 방화범도 적지 않았는데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에 육박했다.
물론 공주형무소에도 치안유지법으로 잡혀온 사람들, 곧 항일운동을 펼친 독립투사들도 종종 있었다. 이들은 죄명이 일반적인 파렴치범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천안에서 체포된 유관순도 공주형무소를 거쳤고, 만주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진두지휘하여 놀라운 전과를 올렸던 오동진(1889-1945) 장군도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이곳에서 눈을 감았다. 구구절절한 사연과 가슴 아픈 기억이 어찌 이것뿐이랴.
우리의 가슴을 더욱 짓누르는 것은 해방 후 여기서 벌어졌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시작은 아마도 1947년 여름에 발생했던 집단탈옥이었다. 7월 초에 공주형무소 교회당에서 재소자들이 애국가를 합창하자, 형무소는 이를 불온하다고 여기고 기동대를 출동시켜 그들을 구타했다. 이에 재소자들은 단식투쟁으로 맞섰고, 이어 8월 말에 ‘좌익’의 주동으로 형무소 직원의 총기를 빼앗고 200여 명이 탈옥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계엄이 선포되고 경찰이 총출동하여 탈옥극은 십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이는 크나큰 비극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2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주형무소에 갇혀 있던 보도연맹 관련자들과 소위 좌익계열 인사 약 500명이 왕촌 살구쟁이로 끌려가 학살을 당했다.
전쟁 후 오랜 동안의 침묵과 금기를 깨고 몇 년 전에 비로소 상왕리의 학살터에서 이들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해마다 이 즈음이면 추모제가 열린다. 하루 빨리 상처가 아물고 다시 평화로운 공존이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