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근대의 풍경> 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의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사진과 함께 엮은 스토리입니다. 공주술도가의 탄생이야기나 대중예술과 민중계몽의 교차점에 위치하였던 공주극장 이야기, 교육도시로서 출범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공주여사범학교 이야기 등 다양한 공주 근대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록물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공주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스토리의 신빙성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스토리가 갖는 공주의 지리적 위치를 지도 속에 지속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고장 공주의 근대시기 이야기를 차근차근 채워가는 전시콘텐츠입니다.
▸지은이: 송충기(공주학연구원 자료실장)
▸게재: 공주문화(공주문화원 발행)
지금은 폐허가 되다시피한 원도심의 공주극장에도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 특히 1930년 후반에는 요즘말로 하면 스타급 가수들로 구성된 초호화 연예인 그룹 <오케레코드> 연주단이 자주 찾아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공주의 청년상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사 지국이 후원하여, 이난영, 김해송, 고복수, 임방울 등이 출현했으니, 당대 최고 인기가수들이 공주를 찾은 셈이었다. 게다가 이 연주단이 나중에 최초의 한류 연예인단인 <조선악극단>과 최초의 걸그룹인 <저고리 시스터즈>를 결성하여 1940년대를 풍미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당시 공주 사람들의 열띤 관심이 이해가 될 법하다.
이 공연단은 ‘백제의 수도, 공주산성’과 금강교 앞에서 단체로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으니, 공연 틈틈이 공주 시내를 돌아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가운데 공주에서 남다른 감회를 가졌을 두 사람이 있다. 먼저 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이끌었던 조선 최고의 흥행사 이철(1903-1944)이다. 그가 바로 공주 출신이다. 공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던 그는 이후 서울로 가서 배재고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 이미 음악 전문출판사를 설립했고 대학에서는 밴드부를 조직했다고 하니, 일찌감치 음악에 대한 천재성을 보였다고 하겠다. 그는 나중에 일본음반회사 경성지점인 오케레코드 회사를 설립하여 공연예술의 마술사로 나섰다. ‘아이돌’을 발굴하기 위해 가수선발대회를 열고, 조선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공연기획의 전문화를 꾀했으며, 조선악극단을 조직하여 일본, 만주, 중국 등지로 순회공연을 했으니, 어찌 원조 한류 혹은 ‘K-pop’의 흥행기획자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1935년 자신이 졸업한 공주공립보통학교 30주년 기념 사업에 전속 가수 28명을 데리고 참석하는 등 공주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다른 이는 김해송(1911-1950?)이었다. 가끔 그를 이난영의 남편으로만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당시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뛰어난 재능으로 다방면에서 20세기 중반 대중음악계를 선도했던 그는 비록 공주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이곳과 인연이 깊다. 원래 평안남도 출신인 그는 어릴 적 공주에서 누님의 보살핌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해송이 연예계에 두각을 나타낸 것이 1930년대 중반이었는데, 연예기획사 사장이었던 이철이 신인가수 김해송을 발탁하는 데 동향의 인연이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해방 후 그는 그 사이에 사망한 이철의 조선악극단을 부분적으로 계승한 K.P.K 악단을 만들어 해방공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누렸다. ‘재즈의 귀재’로 통했다는 그는 꿈의 무대였던 화와이를 밟아보지 못한 채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어찌되었던 오랜 만에 고향 땅을 찾아 공연하고 공산성과 금강철교를 둘러봤을 때 이들이 느꼈을 감격이 고스란이 전해 온다. 당대의 스타 기획사 사장이나 가수답게 이들이 뿌린 염문도 나중에 호사가들의 입방아를 쉴 새 없이 만들었다. 사실 이철이 대중음악에 뛰어든 것은 연상이자 유부녀였던 현송자와 연애 때문이었다. 경성을 뒤흔들었던 이들의 스캔들 못지 않게, 김해송도 여러 연애사를 남겼다. 이러한 일로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일제의 강압과 회유를 완전히 뿌리치지 못했던 점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이들이 공연했던 공주극장은 충남갑부 김갑순이 1932년에 육천원을 들여서 지은 것이다. 그보다 한 해 전에 이곳 최초의 극장이던 금강관(錦江館)이 불타버렸기 때문이었다. 금강관은 1913년에 ‘새 연극장’으로 세워졌는데 유지들이 기부금을 내서 지었단다. 이것의 낙성식을 위해 경성의 유명한 기생 셋과 명창이 공주를 향했다니 한바탕 시내가 떠들썩했을 풍경이 눈앞에 선하다.
초기의 극장, 특히 유성영화가 상영되기 이전인 1920년대에는, ‘신연극’이 주류였다. 당시 소인극(素人劇,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아마추어’가 하는 연극)이 활발했던 것을 미루어 금강관도 그랬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테면 동호인들이 연극을 만들어서 상연했는데, 주류 신파극이었을 것이다. 물론 연극만 무대에 올려졌던 것이 아니었다. 동화경연과 웅변대회가 열리기도 했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강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공주사진관을 운영하던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가 개업을 자축하여 활동사진회를, 또 목포 청년회가 해외의 고학생을 돕고자 ‘목포활동사진대’를 조직해서 이곳에 상영했던 것을 보며, 극장은 참으로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니 극장이 대중을 위한 오락공간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한 마디로 계몽과 교육의 공간이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충남도청 이전반대 시위가 열렸던 곳도 극장이었다. 1931년 초, 곧 불타 없어지기 직전에, 금강관에서 출동한 경찰을 압도하는 시민대회가 열렸으니 여론이 만들어진 곳도 극장이었다. 물론 이 사건은 주민의 생존권이 걸려 있었던 아주 예외적인 것이었지만, 공주 시민들의 회합 장소로 극장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소년단, 청년회, 신문사지국장 등 다양한 단체들이 극장을 애용했으니, 한마디로 당시 극장은―하버마스에 따르면―시민들의 ‘공론장’에 가까웠다. 비록 나중에 일제가 주민들을 총동원하는 데 이용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공주극장과 함께 나중에 이곳 사람들에게 많은 추억거리를 안겨준 호서극장도 이제 옛 모습을 거의 잃었다. 이제 이것들이 문화공간으로 하루 바삐 복원되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래야만 당시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이철과 김해송을 기념할 수 있고, 그들을 잇는 후배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