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근대의 풍경> 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의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사진과 함께 엮은 스토리입니다. 공주술도가의 탄생이야기나 대중예술과 민중계몽의 교차점에 위치하였던 공주극장 이야기, 교육도시로서 출범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공주여사범학교 이야기 등 다양한 공주 근대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록물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공주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스토리의 신빙성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스토리가 갖는 공주의 지리적 위치를 지도 속에 지속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고장 공주의 근대시기 이야기를 차근차근 채워가는 전시콘텐츠입니다.
▸지은이: 송충기(공주학연구원 자료실장)
▸게재: 공주문화(공주문화원 발행)
최근 열풍이라고 할만큼 ‘하우스맥주’나 ‘하우스막걸리’가 유행이다. 필자도 얼마 전 친구가 손수 만든 ‘생’막걸리를 마셔보았다. 술을 잘 즐기지 않고 예전 막걸리에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터라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실제 내놓은 술을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이상하게도 보자마자 입맛이 당겼다. 조금 마셔보니 맛과 향도 좋았으며, 게다가 다음날 아침 숙취조차 없었다. 왜 다들 ‘가내주’를 찾는지 알만 했다. 왜 그 동안에 막걸리는 맛이 없었을까? 술을 달고 사는 친구의 말은 세금이 원인이다. 주세가 워낙 높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릴 적에는 집에서 술을 담그는 것이 불법이었다. 하지만 시골 집에서 가끔 향긋한 냄새가 났고, 다들 묵인해주었다. 집안 제사가 있으면 어른들 몰래 그것을 맛보기도 했다. 물론 면사무소 직원이 ‘밀주’를 찾아 단속을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이 집안을 수색했을 때 느꼈던 불안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 단속인들 앞에서 속절없이 눈길이 자꾸만 집안 뒤뜰 대나무밭으로 행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는데, 이제 누구라도 집에서, 게다가 훨씬 맛있는 술을 담가먹을 수 있다니!
사실 조선말까지만해도 술은 각자 집에서 담가먹었다. 가정에서는 제사에 올리는 약주 때문에, 농가에서는 새참에 마시는 막걸리나 농주 때문이었다. 판매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약주나 탁주 모두 오래 저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 만들어서 판매해야 했다. 조선왕조만 해도 식량이 부족해서 술의 제조를 금지한 적은 있지만 판매하는 술에 과세하지는 않았다. 누구라도 술을 담가 자유롭게 마시거나 판매했던 것이다. 그러니 지역마다 집집마다, 술의 제조법이 다행했고 특산주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주세가 도입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미 통감부 시절에 주세령을 내리면서 전국적으로 20만 호가 넘는 곳이 한꺼번에 세수원이 되었다. 누구나 신고만 하고 세금을 내면 집에서 만든 술이라도 판매가 가능했다. 그렇지만 수많은 곳에 일일이 세금을 부과하자니 과세의 어려움이 생겼다. 그래서 1916년에 일제는 주세령을 공포하여 소규모 가내 주조장의 통폐합을 시작했다. 1916년에 조선주를 생산하던 제조장이 전국에 12만여 곳이나 되었는데 1930년대에는 불과 5천여 곳에 불과했다. 작은 주조장을 합쳐서 ‘자금력 있고 교양 있는 인물’에게 맡겼다. 이렇게 하여 지금으로부터 딱 백 년 전 술도가가 탄생했다.
이를 계기로 술은 아무나 ‘담그는’ 것이 아니라 돈푼깨나 만지는 사람들만이 ‘제조’할 수 있는 ‘산업’이 되었다. 근대식이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신식 기계도 들여와야 했다. 이때부터 양조업은 지방의 유지들이 하는 돈벌이 수단에 되었고, 술도가는 방앗간과 더불어 지역의 부자를 만드는 도깨비방망이 되었다. 게다가 조선의 누룩을 대신하여 일본제 개량식 누룩이 들어오면서 이후 조선주 양조산업에 점차 일본인도 가세했다.
그러면 공주는 어떠했을까? 1930년대 공주읍은 술집이 많기로 유명했고, 절미운동이 한창이던 1940년에도 밀주가 성행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공주인들의 술사랑은 지극했던 모양이다. 제법 규모가 있는 양조장도 읍내에만 너댓 곳이 있었고, 공주군 전체, 곧 탄천, 유구, 계룡, 정안 등지에 있는 것까지 합치면 모두 17곳이 되었다. 그 중 몇 개는 이름까지 알려져 있는데, 시내에 있었던 금강주조장(현 신관동 소재), 웅심양조장(현 중동 소재) 등이 그것이다. 몇 년 동안은 제조품평회나 술맛 품평회인 이주회(唎酒會)도 해마다 열렸다. 양조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작은 업체는 도산했다. 살아남은 업체들은 <공주양조조합>을 결성하여 공동경영에 나섰다. 주조조합 때문에 술값이 내리지 않으니 공주 술꾼들의 불평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세계대공황 때 쌀값이 대폭 하락했지만 양조조합이 담합하여 술값은 내리지 않자 주류소매상들이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공주의 유명한 술도가는 양천손(梁千孫)씨였다. 위에서 언급한 웅심양조장도 그가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불면불휴로 . . .연구훈련한’ 결과 만든 ‘웅심(雄心)’이라는 술의 맛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1931년 공주에서 열린 조선주 품평회에서 상을 받은 적도 있었고. 1933년에 대전에 공주약주를 선전하기도 했다. 나중에 공주 읍내 양조장을 모아서 공주양조조합을 결성하게 하고 조합장이 되었다. 이러한 그를 1938년 동아일보 <공주소개판>에 게재된 기사는 ‘양조계의 패왕’이라 불렀다. 해방 후에도 그는 공주읍 중동 62번지(현재 국고개길 공영주차장 옆)에서 웅심양조조합의 조합장을 맡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일본인이 공주 양조업에 뛰어들었다. 1936년 공주읍 욱정(지금 우체국 건너편 약국 자리)에 양조업이 미고도상점(美古都商店)(株)이 문을 열었다. 흥미롭게도 그 사장이 일본인인 미야모토 겐키치(宮本善吉)였다. 익숙한 이름인데, 그는 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는 데 앞장서서 반대했던 일본인으로 유명하다. 사실 그는 1921년부터 공주에 거주하면서 자동차운송으로 돈을 벌었던 사람이었다. 나중에 충남도회의원까지 지냈는데,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업체가 이곳에 두고 있던 그가 대전으로 가야할 이유는 물론 없었을 것이다. 회사의 이사진이 처음에는 모두 일본인들이었으나, 1939년부터 지역의 유지였던 오경달씨가 감사로 이름을 올렸다. 미야모토 겐키치와 함께 도청이전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그가 정미소로 부를 쌓았다는 점도 이채롭다. 술도가와 방앗간, 이것이 공주의 근대 풍경에서 부(富)를 대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