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번호100020944
제목백제문화제 신문 기사
범위와 내용1987년 10월 22일 대전일보에 게재된 '백제문화제' 신문 기사
백제문화제
역사는 단절하며 승전한다
사상 최대의 축제
19일부터 22일까지 4일간에 걸쳐 펼쳐진 백제문화제는 사상 최대의 것이었다. 공주에서 거행된 이 축제는 규모·짜임새·고증·종목 개발 등 모두에 있어 괄목할 만한 내용들이다. 밤하늘을 불꽃(폭죽)으로 수놓았고 드높은 가을 하늘엔 「애드벌룬」이 두둥실 떠 있다.
큰 규모로 축제를 거행하는 이유를 박찬무 시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①백제문물을 오늘에 재현 선조들의 찬연했던 기개를 기리고 ②공주가 시로 승격한 보람과 긍지를 드높이며 ③지난번 수해 때 입은 상처를 잊기 위한 위안잔치인 동시에 ④새 시대 민주화로 가는 길목에서 시민들의 화합과 ⑤백제문화관광권 개발에 대한 염원 등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잔치를 출연 종목 또한 매우 다양하다는데 박수갈채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전야제에선 공주·왕비(미인)뽑기 가장행렬·농악·제등놀이·불등행렬 등으로 수놓았다.
뿐만 아니라 장승제·불전 행사인 승무·탑돌이·백제혼무·농요·산유화놀이·연날리기·낭자그네뛰기 널뛰기 「머슴호미씻기」 등 민속놀이가 등장했다.
이처럼 새로운 민속을 개발하고 재현하기까지엔 학계·백제문화선양회의 끊임없는 노력에서 비롯했다는 이야기다.
또, 40년간 공주문화원을 이끌며 백제문화 발굴에 헌신해 온 이관용 원장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이번 잔치엔 일본의 소진·웅본·국수정·산구■ 등지에서 80여 명이 건너왔다.
이들 3개 도시는 공주와 자매결연을 맺었거나 백제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지역들이다. 이들 일인들은 성지순례 또는 「아스카」 문화의 원류를 답사한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아스카 문화의 원류
백제는 비록 패망은 했으나 3국 가운데 가장 빼어난 문물을 자랑했고 융성을 누렸던 나라이다. 그런 이유로 백제 후예들의 기개나 긍지는 대단한 데가 있다. 백제 전성기엔 멀리 요동반도는 물론 중국 대륙에까지 미쳤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생각할 점이 있다.
백제 문화가 일본에 전파, 건국의 기초가 됐다는 점에 대해선 일인들도 부정하질 않는다. 일본의 천황 혈통이 백제계(도래인) 또는 기마민족으로 이어진다는 소리를 우리는 흔히 들어왔다. 가장 교류가 왕성했던 시기는 4-5세기 경이다. 우리 문화가 일본에 영향을 끼친 시기는 3단계로 파악할 수 있다. ①상고시대 ②백제를 비롯한 3국 시대 ③조선조 후반·임진란 이후의 도쿠가와 막부 시절로 보는 게 통설이다. 특히 백제 때는 왕인박사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 등을 전했고 불교 전수는 물론 조사공, 조불공, 와박사 등 많은 인물들이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은 그 영향을 받아 건국을 했고 천황계를 백제인 혈통이라 말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조 후반기는 「조선조통신사」에 의한 문물의 전수였다. 임진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했다가 패퇴한 후 덕천가강은 화해와 교류라는 명분으로 우리와 통신사를 초청했다. 5백명에 달하는 「양반」 행렬이었다.
왜인들은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로 향하는 「양반」 행렬 앞에 길가에 무릎을 꿇는 등 융숭한 영접을 했다. 그러나, 일본의 극렬파 「아라이」 등은 그들의 긍지와 주체성에 문제가 있다해서 한때는 1대 1의 대좌로 나왔다. 임진란에선, 「도자기」 전쟁이라 이를 만치 조선의 생활문화를 수탈해 갔다. 오늘날 「사쓰마」 소, 유전소 등은 조선 도공을 볼모로 잡아가 자기를 굽게 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이삼평·심당길 등은 그때의 희생자들이었다.
현재 도자기 문화가 원류인 한국보다 일본이 한 수 위라는 점은 예사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원류 의식, 그 「텃세」만을 내세울 입장이 못 된다. 일본엔 현재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5백명 선에 이르고 있다. 재야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반면 일본 역사와 백제 연구를 하는 우리 학자는 기십명에 불과하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유물과 대화한다
백제는 멸망국임엔 틀림이 없다. 그렇다 해서 그 문화를 외면하거나 격하를 일삼는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역사란 단절하면서 승계를 하고 승전하는 가운데 또 단절하는 법이다. 오늘의 존립은 어제의 밑거름 위에서만 가능하고 또 오늘의 의미는 내일을 전제로 파악돼야 옳다. 엄밀한 뜻에선 역사, 오랜 나라나 민족치고 흥망을 거듭하지 않은 예가 없다.
「로마」와 유태인, 일본, 중국도 예외일 수 없다. 따지고 보면 고구려와 신라도 끝내는 망하지 않았던가. 역사와 문물을 보는 안목에 있어 객관성과 과학성 같은 걸 저버려선 곤란하다. 도에 넘친 유아주의나 흑백논리, 편견 같은 건 사상과 본질을 그릇된 방향으로 정의하기 쉽다. 3국의 역사나 문물을 놓고 신라 것만이 최량의 것이라든가 고구려 것만이 우수하다는 등 상대 것을 마구잡이로 평가절하하는 따위 독선은 배격돼야 한다. 비근한 예로 복식 하나를 놓고 생각을 해보자.
고구려 벽화에 새겨진 여인들의 전진치마는 간편하고 첨예적이며 활동적이어서 호감이 간다. 이는 깔끔한 고구려 여인들의 기질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또, 신라 천마도에 각인된 여인의 복식은 선이 굵고 장중하다는데 특징을 갖는다. 그다음 백제의 의상은 어떠한가. 선이 느슨하고 섬세하며 유려한 맛을 드러낸다. 이렇듯 각기 지니고 있는 특징을 수용하고 또 이에 상응하는 의미 부여를 해야 옳을 것이다. 어느 한쪽이 절대 선이고 여타는 추악하다는 등의 「흑백논리」 같은 건 있어 안 된다.
문화유산의 보전
경주엘 가게 되면 누구나 「석굴암」을 찾기 마련이다. 석굴암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너무 신라 독창성만을 강조하다 보면 유아주의에 흐르기 쉽다. 필자가 생각하기론 석굴암은 3국의 특징을 두루 수용한 종합작품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석굴암 내부의 대불은 신라인의 독창물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불상의 근엄한 표정이라든가 으쓱 올라간 어깨, 골격 등이 다부지고 가슴팍이 우람한 점 등 신라인의 기개를 잘 나타낸 작품이다.
그러나 암자 입구 양쪽에 서 있는 돌기둥은 고구려 쌍용총의 8각주를 그대로 닮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중앙의 대불 둘레에 새겨진 시불을 보면 느껴지는 게 있다.
시불 중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백제 불상을 그대로 닮고 있다. 자애로운 얼굴 표정, 「가사의 선」이 그렇게 부드럽고 느슨하며 유려할 수가 없다.
그 불상은 백제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석굴암의 구조는 3국 것을 수용했거나 도입했다는 인상이 짙다.
부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불상을 보라. 느슨하고 부드러운 선하며 표정은 마냥 자비롭고 평화롭기 이를 데 없다. 「백제의 미소」라 이름하는 이 불상은 미술작품으로서 길이 남을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백제문화의 개발과 재현은 이제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무령왕릉 발굴 때 「에피소드」를 한 가지 소개하자. 그때 학자들은 물론 참관자들까지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석수·목관·장식물·부장품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 기자가 질문을 했다. -백제 때는 왕관이 없었습니까- 라고. 모 석학은 백제 땐 왕관이 없었다고 답했다. 그러나 잠시 뒤 관이 나왔다. 찬란한 불꽃무늬의 관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 백제에도 왕관이 있었다고 정정하는 통에 장내에선 폭소가 터져 나왔다. 또 무령왕릉 발굴은 비과학적인 수법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니 백제문화개발 연구는 이제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너무 서둘 일도 아니다. 경주권처럼 「시멘트」 문화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방향으로 말이다.
발행처대전일보
생산자/생산기관대전일보
생산일자1987.10.22
기증자/수집처공주학연구원
주제분류지역개발,관광>관광>백제문화제
형태분류도서/간행물류>신문
시대분류현대
출처분류기관
공개구분공개
공개비공개사유수집처 협의사항
원본여부사본
열람조건조건없음
물리적 특성특이사항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