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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전국 국어국문학 학술대회 개최 안내
1956년 충남공주군계룡면유평리UN한협충남지부에서 발행한 통지서와 영수증이다. 통지서에 따르면 금국연한협회비로 일금 육십원을 7월 11일까지 납입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1952년에 영명중학교 학도호국단의 보건위생반장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영명중학교 학도호국단장은 교장이 겸임하여 황인식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윤여헌 교수가 자필로 쓴 문서이다. 우리나라 헌법에 대한 강의안으로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 중 생존권,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와 비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공주영명중학교 서무과에서 1953년에 발행한 영수증이다. 원래 영수증에 인쇄된 내용은 수업료였으나 밑줄을 긋고 좌측에 호(號)의 약자를 기재해 놓았다. 청구한 금액 일금 일만원이며, 자료 하단에 영수받은 학생의 성명이 적혀 있다.
마곡사 기록자료 조사카드 중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에 관한 것이다.
1955년 공주중학교 재학생에게 발행한 영수증으로, 찬조금 및 재건비로 일금 오백환을 청구 및 영수하는 문서이다. 한국저축은행 공주지점에서 영수하였으며, 하단에 수납을 증빙하는 도장이 찍혀 있다. 학생 성명은 좌측에 있으나 우측에 학부모 성명을 함께 작성하였다.
1945년 공주 금성금융조합에서 발행한 통장으로, 표지를 제외하고 약 10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에는 '거치예금증서'라는 제목과 함께 예금자의 성명과 주소 등이 기재되어 있으며, 계약서 및 약관도 내지에 탑재되어 있다.
1911년 공주 산성정 일대의 대로에서 진행한 신무일왕 탄신기념 식목행사의 모습을 엽서로 제작한 것이다. 대로의 끝 부분에 위치한 공산성 쌍수정의 모습과 함께 당시 산성정에 위치한 석유창고의 모습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1952년도 영명중학교 신입생 선발절차를 안내하는 문서이다. 입학정원과 자격, 응시절차 및 제출서류 등이 안내되어 있다. 제1학년 입학 정원은 남자 120명으로, 국가고사에 응한 학생에게 자격을 주었고, 국가고사 번호표에 등록금 2천원을 첨부하여 학교에 제출하여야…
계룡국민학교에서 35회 졸업생인 진경희님에게 단기 4285년 6월 24일에 발행한 영수증이다. 2000원을 청구한 것으로 보이며, 월분 및 종별을 기입하는 곳을 기재하지 않아 금액을 청구하는 이유를 파악하기 어렵다. 담임성명 대신 도장을 찍었다.
1955년 공주교육구에서 주최한 제2회 종합체육대회에서 유구국민학교 육상부가 남자부 1위의 성적을 거두어 컵을 수여하고 이를 표창하는 내용의 상장이다.
1998.12.17. 일시, 장소 백송식당이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 송년 및 회지 제11집 출판기념 모임으로 참석대상은 회원 및 통역자원 봉사자이다. 옆에 94년 발족(發足)이라는 윤여헌 교수의 메모가 첨부되어 있다. 기타사항에 12.18. 본회 주관으로 개최되고 있는…
1955년 공주중학교 신입생 책상 및 의자 대금으로 일금 일천육백환을 청구 및 납입을 영수하는 문서이다. 한국저축은행 공주지점에서 영수하였으며, 하단에 수납을 증빙하는 도장이 찍혀 있다.
공주영명중학교 서무과에서 1953년에 발행한 수업료 영수증이다. 영수증에 의하면 청구한 수업료는 4월분으로, 일금 이만칠천원을 청구하였다. 자료 하단에는 영수받은 학생의 성명이 적혀 있다.
1971년 내무부에서 조국근대화에 앞장서고 내고장 건설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 공주문화원 이관용 원장에 대한 감사장이다.
연도미상의 서적 '駐韓日本公使館記錄(주한일본공사관기록) 1'을 복사한 자료이다. 앞에 작은종이로 공주 당시 전봉준 휘하의 농민군 공격로 약도와 동학농민전쟁, 갑오개혁, 청일전쟁의 시대적 흐름이 담겨있다. 서적복사본은 동학농민군의 실태와 전투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1952년 공주군 계룡면에서 발행한 전(全)기분 임대세 영수증으로, 일금 일천육십오원을 영수하였다. 전표 상단에 '영수증'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전표 우측에는 발행연번, 리(里), 납세자명을 기재하는 칸이 있고, 금액과 세금 명목을 적을 수 있는 란이 있다.
일제강점기 공산성 옆 일명 '벚꽃터널'의 모습이다. 이곳은 금강을 건너면 나오는 공주의 진입로로서 현재 금강교 남단에서 금서루를 지나 시가지로 들어가는 도로(現 웅진로)이다. 일제는 공산성을 공원화하며 이름을 '산성공원'으로 바꾸며 성내에 많은 벚나무를 심었는데, 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