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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헌 교수가 이구치켄(井口 賢明)에게 보내는 서신의 초안문이다. 서신의 첫 머리에 질문에 답한다고 쓴 것으로 보아, 이구치켄이 윤여헌 교수에게 '궁원(弓院)'의 의미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먼저 써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윤여헌은 서신초안문에 궁원(弓院)에 대해…
1974년 2월 18일에 계룡국민학교에서 발행한 민대순님의 상장이다. 6학년과 민대순이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맡은 일에 충실이 임하여 표창한다는 내용이다.
기증자가 집안 제사에서 읽을 제문을 작성한 것이다.
공주문화원에서 1993년도 제1차 세입세출 추가경정예산안을 상정하고 심의 가부를 결정하기 위해 발송한 서면결의문이다.
공주시에서 주관하는 백제문화제의 위원장인사말과 식순, 행사일정표와 각 행사별 사진자료 및 설명문 , 문화제 일람표와 사진자료를 수록함
1992년 8월 공주 금성여자고등학교 교장 신경남의 인사말이다. 일본 누마즈북로타리클럽 창설 30주년 기념사업과 공주로타리클럽과의 결연 10주년 기념사업으로서 치르는 상호초청교환행사장에서 같은 학교 이사장 김윤태이 나눈 인사말 내용과 비슷하다.
1968년에 작성된 정안국민학교 입학원서이다. 원서는 퇴학, 입학, 휴학원서 공통으로 사용되는 약식이다.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의 이름과 생년월이르 보호자의 성명과 서명이 기재되어 있다. 정안초등학교는 1922년 5월 23일에 정안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 이후…
1916년에 공주군 장기면(長技面) 도계리(道溪里)에 사는 최희찬(崔喜燦)이 자신의 선조인 최중경(崔仲慶)의 분묘를 조성하고자 관부에 신고한 묘적계 문서이다. 제출서는 공주경찰서장 경부 장사정태(庄司政太)이다. 문서에는 최중경의 사망연월일과 제주의 주소, 성명이…
윤여헌 교수가 자필로 작성한 제2건국위원회 전체회의 인사말 메모이다. 총선이 실시됨에 따라 제2건국위원회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그동안 진행되지 못했던 총회를 금회에 치르게 된 것에 대한 내용을 시작으로 인사말이 담겨 있다.
1910년대 어느 여름 날 앵산공원(現 3.1중앙공원)에서 공주시가지를 촬영한 사진그림엽서이다. 봉황산 아래 충남도청에서 동서방향으로 난 욱정거리(現 감영길)와 남북으로 흐르는 제민천을 사이에 두고 충남행정의 수부(首府)답게 충남도청과 공주지방재판소(現 공주지방법원),…
1798년 마곡사에서 발행된 공주이씨세보에 관한 것이다.
1962.02.22, 다방 낭낭에서 진행한 제80회 음악감상회 안내문이다. 당시 감상곡으로 드뷔시의 '바다'라는 곡이 연주되었다. 또한 본 감상회에 참여하기 위해선 회비 200환을 납부해야했다.
1990년 우성농업협동조합에서 주최한 농촌어린이 그림그리기 대회에서 귀산국민학교 4학년 오정화 학생이 우수상을 수상한 내용의 상장이다.
계룡국민학교에서 35회 졸업생인 진경희 님의 2학년 수료증서 및 성적통지표이다. 수료증서는 국민학교 2학년과정을 수료하였음을 증명하는 내용과 교장선생님의 성함과 직인이 찍혀있다. 성적통지표의 경우, 교장/교감/담임선생님의 성명 아래로, 각 교과목의 점수와 학생의…
윤여헌 교수가 자필로 작성한 관련 강의자료이다. 문서의 서두부분에 2000년 7월 28일과 8월 1일의 교련반을 위한 강의내용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강의안에는 6.15남북공동선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히 남북연합에 관한 내용이 담긴 제2항을 설명하고 있다.
2015.3.20일자로 예정된 공주시 향토문화유적보호위원회 회의 개최 알림 공문이다. 문서는 요약본, 공문, 회의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장소는 공주시청이며 참석자는 공주시 향토문화유적보호위원회 위원이다. 안건은 2.전의이씨 3쌍 효열 정려 향토문화유적 지정 심의…
소화 16년 3월 20일에 계룡공립국민학교에서 발행한 민병영 님의 상장이다. 2학년과 창씨개명한 성명(평강병영)이 기재되어있으며, 학업에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상과 상품을 수여하여 표창한는 내용이다.
부여군에서 주관하는 제 23회 백제문화제의 행사계획확정 및 종목별 분담사항과 종목별 예산보조안을 수록함
지금의 금강교 아래 공산성 서쪽 암벽가에 있던 금강나루의 모습이다. 이 부근에서 1915년 이후 목교와 주교가 연이어 가설되는데, 엽서 속 모습은 목교 설치 이전에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던 시기로 보여진다. 멀리 금강 건너 신관동과 시목동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