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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5244건
1952년 공주군 계룡면에서 발행한 납세고지서이다. 전표에 의하면 발행연도 및 납세자의 성명, 리(里)가 적혀있고, 다음칸에 조세명인 '갑종제1종토지수득세'가 인쇄되어 있다. 이하로 납부해야할 정조(定租) 및 대두를 기입할 란이 있다. 공란으로 남아 있지만 기한 내에…
1977.03.16에 진행할 공주문화원 제39차 이사회 및 총회 개최 통지문이다. 본 자료에 따르면 회의를 통해 1976년도 사업실적 감사보고와 세입세출 결산서 심의의결, 1977년도 세입세출 예산심의 의결을 진행할 예정이다.
우금티 순국 영령 추모 예술제 기념사이다. 윤여헌교수님이 기념사를 맡았다. 왼쪽 상단에 2라고 메모가 적혀있으며, 윤여헌 교수님이 제목의 축사를 기념사로 수정한 메모가 있다. 추모예술제의 의의와 협조자들에 대한 감사글을 담고 있다. 뒷면에 수정흔적이 보인다.
충청남도교육위원회에서 실시한 교육연수를 이수했음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본문은 표로 작성되어 있는데, 성명,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한 인적사항과 연수종별, 기간, 이수시간 등이 기재되어 있다.
마곡사 기록자료 조사카드로 응진전에 걸려있는 '공주태화산마곡사나한전중건기'에 관한 것이다. 나한전의 중건은 1851년 정월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03월까지 진행했다.
기증자가 1984년 공주사범대학부속중학교에 근무하면서 작성한 교무수첩이다. 담당 수업을 들어가는 반 학급 학생의 성적과 수행평가 점수 등이 적혀있고, 교무회의 중 나온 중요 내용을 필기한 부분도 눈에 띈다. 또한 본 자료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는 사대부중과 사대부고…
1977년 제37회 공주군 배구대회의 임원명단이다. 당시 배구대회는 제2회 김종필기 쟁탈배구대회를 겸해서 개최되었다.
공주군 장기면(長岐面) 장암리(壯岩里)에 거주하는 주민이 학창시절부터 소장하고 있던 일선장병 위문엽서이다. 한국전쟁 이후 국립충남상이군인정양원에서 제조 및 발행하여 각 국민학교에 배부하였고, 학생들이 쓴 위문엽서를 상이군인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운영하였다고 한다. 엽서…
1986학년도 우성초 교육계획이 담긴 문서이다.
공산성의 쌍수정은 조선 16대 국왕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피난 햇을 때, 나무에 기대어 난의 평정소식을 들었다는 유지를 기념하기 위해 1734년(영조 10) 충청도관찰사 이수항이 건립한 누정이다. 엽서 속 모습은 오늘날과 다르게 쌍수정 아래 사적비각 쪽에서…
1930년대 '백제의 고도'시리즈 엽서 중 마곡사 대웅보전을 담은 사진그림엽서이다.
1967년 제22주년 8.15 광복절을 맞아 공주군민이 국기에 대한 존엄성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 국기계약 계몽 선전 주간에 배포한 국기계양법과 계도방법이다.
오태식이란 인물이 금 250원을 빌리고 1회에 반제하는 단기담보대부로 빚을 갚는 데에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추가서류가 첨부되어 있지 않아 담보물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연대보증인은 오영진으로 쓰여있다.
1955년 정안국민학교의 제2학년 수료대장이다. 내지에는 졸업자들에게 부여된 증서번호, 수료연월일, 주소, 생년월일, 성명, 호주 등을 기록하였다.
1984년 정안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서 배포한 유치원 요람이다.
공주 배다리(구 금강교)유적 조사 - 윤여헌님이 그린 1930년 공주시가지 지도
1961년 공주 계룡면 농협에서 발행한 영수증이다. 원래는 비료와 인분 계상서였으나 두줄밑줄을 긋고 '영수증'이라고 정정하였다.
1989년 공주사범대학부설중등교원연수원에서 진행한 연수교재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법사 교육의 새로운 동향
1. 헌법의 기초원리로서의 민주주의
2. 국민주권
3. 기본권
4. 권력분립주의
5. 헌법개정
1996년 7월 13일 저녁 8시부터곰나루 국민관광단지 내 특설무대에서 열린 공주시민을 위한 곰나루 한 여름밤 대축제 '시민화합한마당' 행사 안내장이다. 이 행사는 계룡문화예술회예술단에서 주최하고 공주시 생활정보지 사거리와 공주신문사에서 후원하였다. 이 안내장에는…
현재의 공주고등학교 뒤편 옛 충령탑 부근에 위치한 정수장 배수탑의 모습이다. 공주의 상수도시설은 1923년 완공되어 동년 4월 1일부터 급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수돗물을 이요하는 사람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은 5명 중 1명 정도만 집에서 식수를 공급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