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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45건 우리암
I. 우리암 선교사의 한국독립운동 관련 활동에 관하여
II. Williams 선교사의 수제자 황인식 선생의 삶
[부록] 교육으로 공주의 근대를 열다. 우리암 선교사
I. 우리암 선교사의 한국독립운동 관련 활동에 관하여
II. Williams 선교사의 수제자 황인식 선생의 삶
[부록] 교육으로 공주의 근대를 열다. 우리암 선교사
1909년에 졸업한 영명학교 제2회 졸업생들과 교직원들의 단체사진이다. 가운데 우리암과 우애리시 부부를 중심으로 3열로 앉아있다. 우리암 부부의 바로 왼쪽에 있는 인물이 독립운동가이자 해방이후 민주당 대선후보로 출마했던 조병옥 박사이고, 바로 오른쪽은 논산 출신의…
1940년 11월 우리암 교장이 영명실수학교를 떠나는 모습이다. 일제는 1930년 중반 이후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고, 1940년에 이르러 전쟁이 가시화되자 일제는 국내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을 강제출국시키는 조치를 시행하였다. 우리암 교장은 귀국을…
1940년 11월 우리암교장이 강제출국 되기 전 교사, 학생들과 찍은 송별사진이다. 일제는 1930년 중반 이후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고, 1940년에 이르러 전쟁이 가시화되자 일제는 국내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을 강제출국시키는 조치를 시행하였다. 우리암…
1941년 남자 제7회 여자 제5회 영명실수학교 졸업앨범에 수록된 사진으로, 남자부 학생들이 우리암 교장 동상 주변 환경을 정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속 우리암 동상은 1937년 10월 영명학교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것으로, 이후 일제가 전쟁물자로…
1941년 남자 제7회 여자 제5회 영명실수학교 졸업앨범에 수록된 실습지 전경으로, 현재 옥룡동 대추골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실업교육을 강조하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별개로, 우리암 교장은 가난한 시골사람들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스스로 실업교육의 필요성을…
1941년 남자 제7회 여자 제5회 영명실수학교 졸업앨범에 수록된 사진으로, 우리암(禹利岩, 영문명 Rev. Franklin, E.C. Williams) 교장의 동상이다. 우리암 교장은 미국 감리회의 해외 선교 100년 기념사업으로서 1921년 10월 영명학교 설립에…
차례 - 1부 공주를 서방세계에 알리다/ 2부 영명동산에 묻힌 사람들/ 3부 충남 최초의 근대학교를 세운 윌리엄스 선교사/ 4부 유관순 열사의 첫 스승 사애리시 선교사/ 5부 한국의 사람과 문화를 사랑하다/ 부록
차례 - 1부 공주를 서방세계에 알리다/ 2부 영명동산에 묻힌 사람들/ 3부 충남 최초의 근대학교를 세운 윌리엄스 선교사/ 4부 유관순 열사의 첫 스승 사애리시 선교사/ 5부 한국의 사람과 문화를 사랑하다/ 부록
2020년 10월 28일~11월 29일 충남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 특별사진전 의 전시도록이다. 도록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100년전 학교와 학생들/ 2. 변화의 물결,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3. 농사, 그리고 소소한 일상
2020년 10월 28일~11월 29일 충남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 특별사진전 의 전시도록이다. 도록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100년전 학교와 학생들/ 2. 변화의 물결,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3. 농사, 그리고 소소한 일상
1. 머리말 / 2. 들어가는 말 / 3. 내한, 서울 선교와 결혼, 남편의 순직 / 4. 다시 내한, 혼자 개척한 충남 여성 선교 / 5. 3.1운동 이후의 선교 / 6. 한국인 목회자 중심의 연회 시작 / 7. 귀국 이후 사 부인의 삶과 소천 / 8. 전기를 마치며
1930년대 영명학교에서 예배 인도하는 우리암 교장과 학생들의 모습이다.
1937년 10월 15일 영명학교 개교 30주년 행사에서 설립자 우리암 교장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이 동상은 1940년대 초 일제의 공출에 의해 없어졌고, 1985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1940년 11월 24일 강제출국을 당한 우리암 교장의 출국을 배웅하는 장면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선교사들을 추방하였다. 우리암 교장이 떠난 후 영명실수학교는 1942년 3월에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1941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우리암 교장은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에 다시 돌아와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영명학교의 우리암 교장 부부와 그의 아들 우광복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