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 2. 들어가는 말 / 3. 내한, 서울 선교와 결혼, 남편의 순직 / 4. 다시 내한, 혼자 개척한 충남 여성 선교 / 5. 3.1운동 이후의 선교 / 6. 한국인 목회자 중심의 연회 시작 / 7. 귀국 이후 사 부인의 삶과 소천 / 8. 전기를 마치며
1930년대 우리암 교장의 집무 모습이다.
영명학교 설립자 우리암 교장 가족이다.
1930년대 영명학교에서 예배 인도하는 우리암 교장과 학생들의 모습이다.
1937년 10월 15일 영명학교 개교 30주년 행사에서 설립자 우리암 교장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이 동상은 1940년대 초 일제의 공출에 의해 없어졌고, 1985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1940년 11월 24일 강제출국을 당한 우리암 교장의 출국을 배웅하는 장면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선교사들을 추방하였다. 우리암 교장이 떠난 후 영명실수학교는 1942년 3월에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1941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우리암 교장은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에 다시 돌아와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영명학교의 우리암 교장 부부와 그의 아들 우광복의 모습이다.
영명학교 설립자 우리암 교장이다.
영명학교 설립자 우리암 교장 부부이다.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있었던 건물로 영명학교의 선교사들이 생활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