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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5244건
1954년 공주군 계룡면에서 발행한 제1기분 토지수득세 고지서 및 영수증이다. 발행연도 및 납세자의 성명, 리(里)가 적혀있고, 다음칸에 조세명인 '갑종제1종토지수득세'가 인쇄되어 있다. 이하로 납부해야할 대맥를 기입하는 란이 있는데, 계룡면 유평1리 진상옥 님에게는…
이것은 윤여헌 교수가 자필로 작성한 에 대한 메모이다. 이 고장은 역사문화도시로서 백제와 조선을 구분지어 타 지방의 문화재와 차별성을 두는 방안을 메모하였다. 먼저 무령왕에 대한 홍보브랜드 전략으로서 왕릉, 무령왕 관련 박물관 부장품, 정지산유적 복원, 만화 제작,…
1960년 공주고등학교 학생에게 발행한 영수증으로, 제3기분의 납부금으로 일금 육천구백환을 청구 및 영수하는 내용이다. 공주고등학교 수입원 명의로 영수하였으며, 납부 내역은 수업료와 사친회비 명목이다. 영수받는 학생의 학년, 반, 번호 및 성명이 우측에 기재되어 있다.
1959년 공주군 계룡면에서 발행한 정(定)기분 제2종토지수득세 납세고지서이다. 일금 팔백오십육원을 12월 5일까지 면사무소에 납부할 것을 안내하고 있다. 전표 상단에 '납세고지서'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전표 우측에는 발행연번, 리(里), 납세자명을 기재하는 칸이…
1975년 연초 공주 관내 대학과 고등학교 입학시험 기간을 맞아 외지에서 내방한 수험생을 도와주기 위한 봉사활동에 공주시민이 적극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이다.
1993년 공주교육대학에서 주최한 '제4회 대전직할시, 충청남도 국민학교 미술실기대회'에서 귀산국민학교 6학년 오연덕 학생이 입선하여 상을 받은 내용이다.
마곡사 기록자료 조사카드로 토굴암 관음전 내 신중도에 관한 것이다.
계룡국민학교에서 발행한 교과서대금 영수증이다. 단기 4286년 4월 13일에 발행되었으며, 교과서대금으로 일금 이천사백원을 청구하였다. 담임선생님의 성명대신 도장이 찍혀있으며, 35회 졸업생인 진경희님에게 발행되었으나, 성명을 오기하여 수정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윤여헌 교수가 자필로 쓴 메모로, 2009년 10월 18일에 있었던 제23회 공주회(公州會) 전국집회인 '가라쓰 대회'의 인사말 원고가 담겨 있다. 또, 메모의 상단에는 공주회의 해산에 관해라고 하고 창립에서 2015.10.28일 해산이라는 정보도 추기되어 있는 것으로…
공주 수촌리 유적 발굴 1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후루야 발표 보조자료3
1977년 공주문화원에서 향토문예진흥 사업의 일환으로 관내 여성백일장을 개최하니 대회 참가에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이다.
2007.11.23.자 조선일보 신문 일부 복사본이다. '故 이방자 여사의 외조카 이케노보 야스코씨 방한'이라는 기사 소제목으로 '일본문화의 뿌리인 백제문화 배우러 왔어요'라고 기사 대제목이 쓰여 있다. 그녀는 당시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의 초청으로 공주와 부여를 찾았다.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50주년 기념집 - 구원투수조 인터뷰(문경호)
1989년 공주시 교육청에서 주최한 제28회 시.군 내 초.중학교 학생 음악경연대회에서 귀산국민학교 합창부가 동상을 받은 내용의 상장이다.
제24회총회 야마구치에서 개최
무령왕생탄제에 참가하다
무령왕릉 출현 40주년기념강연회
외신왕래(선배, 동기부터) - 윤 여헌씨, 이 화영씨
동·서·남·북
헤이세이 22년도 결산보고서
공주회 회칙
역원명부
편집후기
회원명부 24년 1월 현재
윤여헌 교수가 자필로 작성한 메모이다. 공주향토연구회가 일본의 공주회와 교류하면서 회장으로서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말이다. 본문에 의하면 공주향토문화연구회와 공주회와의 금후이후의 교류를 제안한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문서번호 500011710 건과 같은 내용으로 이…
공주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였던 故 유보근씨가 공주의 지정문화재 사진을 직접 찍어 만들려고 했던 공주문화재 도록의 초고본이다. 이 도록에는 약 210여점의 사진이 필름의 형태로 각 유적마다 1~4장까지 부착되어 있다. 또 각 유적에 대한 설명은 충청남도에서 발행한…
부여군에서 주관하는 백제문화제에 대한 세부행사추진계획을 수록함
윤여헌 교수의 일본 유학을 기념하여 김기평 등 여러 학생과 주변 인물들이 송별사를 적은 수첩이다. 수첩의 앞 부분만 송별사가 적혀있고 나머지는 모두 공백인데, 일기장으로 사용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