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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공주 상반정(現 봉황동 일원) 부근에 위치한 상반여관이다. 당시 공주의 대표적인 여관으로 시찰단 등 주요인사가 머물기도 했다. 엽서 중간에 상반여관 입구의 모습과 측면을 후편집하여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1911년 일제는 신무일완 탄신기념으로 공주 곳곳에 대대적인 식목행사를 진행했다. 본 엽서는 현 금학동 경찰서 부근으로 추정된다. 엽서 상단에는 공주에 거주하는 내지인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자필이 남아있다. 자필에 의하면 엽서에 나온 마을에 본인이 거주하며, 근처에…
동치 12년(1873, 고종10) 1월, 이주일을 통정대부로 임명한 교지. 나이 90세가 되어 법전에 따라 가자함.
연도미상으로 10월 10일부터 10월 21일까지 공주로타리클럽에서 일본국 누마즈로타리클럽 회원을 맞이하는 일정표이다. 일시, 장소, 영접회원명단, 비고사항이 기재되어 있으며, 일부 빠진 내용은 윤여헌교수가 직접 자필로 메모해 두었다.
부여군에서 주관하는 제 28회 백제문화제의 행사계획과 사업계획 총괄, 행사세부추진계획과 세부 행사별 진행에 대한 도표를 수록함
1950년 기증자가 월산공립국민학교에 재학하던 중 수여받은 품행단정 상장이다.
일본공주회 정기회의에서 취임인사글과 보고 안건 수록
백제문화선양위원회위원장의 주재로 제 42회 백제문화제의 행사종목 변경 , 세부추진계획 , 행사예산안에 대해 토의한 회의록 / 회의요약 , 부여군백제문화선양위원회 명단 수록
1969.02.27, 공주문화원 회의실에서 진행된 제6차 정기총회 회의 속기록이다. 당시 총회에서는 1968년도 사업실적 보고와 함께 감사보고, 세입세출 결산보고, 1969년도 세입세출 예산서 심의가 진행되었다.
2009년 7월 명재 윤증 관련 유물이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기탁된 사실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스크랩해 놓은 것과 공주 송선교차로 부근 지도를 다시 복사해 놓은 것이다. 2009년 7월 7일 중도일보 '명재 윤증선생 유물 1만여점 오늘 지역민 품으로', 2009년 7월…
본 자료는 기증자가 정안중학교에서 교직생활 중에 받은 1975년 3월분 월급봉투이다. 기증자는 1971년부터 2004년까지 공주를 비롯한 청양, 보령, 논산 등에서 교직생활과 교육청, 교육연수원, 교육원 등에서 공직생활을 지냈다. 봉투 전면에서는 상단에 이름을 적고 그…
윤여헌 교수가 자필로 적은 공주향교중수기 해석문 초안이다. 메모지에는 중수기의 원문을 해석한 내용을 기재하고, 수정 및 오탈자 등의 수정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이 공주향교중수기는 공산지에 수록된 것으로, 1813년 충청도관찰사 원재명이 향교전체를 중수하면서 쓴…
1957년에 발급된 정안국민학교 졸업장이다. 정안초등학교는 1922년 5월 23일에 정안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 이후 정안공립심상소학교와 정안국민학교를 거쳐 정안초등학교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37년에 학생 수가 증가하여 문천간이학교가 개교하였는데, 1944년에…
대한민국 공주대학교, 일본국 야마구치대학 학술교류협정서
1910년대 초반무렵, 앵산공원(現 3.1중앙공원)에서 공산성 방향인 북쪽을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그림엽서이다. 500008204와 비교했을 때, 불과 몇 년 사이에 듬성듬성 자리잡은 민가가 늘어 났음을 볼 수 있다. 이곳은 현재 중동 큰사거리 부근으로, 충청병영의…
1938년 유구에서 태어났으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에 대한 열망으로 평생일기를 써왔다. 기증자의 직업이었던 직조, 방앗간, 농사에 관련된 이야기와 유구의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오랜 천주교신자로 유구성당의 사목회장을 역임했다. 유구성당에 관한…
수상내역에 관한 상세기록
1959년 공주고등학교 학생에게 발행한 영수증으로, 제4기분의 납부금으로 일금 육천구백환을 청구 및 영수하는 내용이다. 공주고등학교 수입원 명의로 영수하였으며, 납부 내역은 수업료와 학도호국단, 사친회비와 기성회비 명목이다. 영수받는 학생의 학년, 반, 번호 및 성명이…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는 석가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이 모셔진 대웅보전과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대광보전이 존재한다. 대광보전 마당에는 라마교 양식의 풍마동이 올려진 5층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현재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탑의 위치가 희지천 쪽으로 남진했음을 알 수 있다.